[서울생각, 평양생각] 중국에서의 아픈 기억
김춘애
2008-08-18
며칠 전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아이들과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손녀의 재롱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난데없는 전화 한통이 걸려 왔습니다.
요즘 광고 전화가 이런 식으로 많이 오기도 하고, 또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가 않아 처음엔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번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와 저는 혹시 하는 의문을 품은 채
손전화기를 들었습니다. 난데없는 중국말이었습니다.
저도 서툰 중국말로 잘못 걸었다고 말해 준 뒤에 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전화벨은 계속 울렸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다시 전화를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말로 제 이름을 부르며 맞는가고 했습니다.
저는 맞는다고 했더니 중국에서 부탁을 가지고 왔다면서
언제 시간이 있으면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주말이라 시간이 돼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마침 회사 생활하는 둘째 딸이 시간이 되어
함께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만나고 보니 제가 중국에 있을 때 한마을에서 살았던
아주 잘 아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처음엔 반가웠습니다. 말도 모르는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상실하고 하루하루를 피눈물을 흘릴 때
뒷집에 살면서 조금이나마 어시가 되어 주던 아줌마였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주인집이 무서워 그 때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고, 속을 털어 놓고 싶어도 속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그저 마음속으로 조금이나마 겨우 의지하여 왔던 그런 관계였습니다.
한참 반가워하던 중국 아주머니는 부탁을 가지고 왔다면서
새 가정을 가졌는가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게 그리 쉽냐면서 아직 결혼 안했다고 말을 했더니
중국에서는 저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순간 저는 소름이 오싹하며 온몸에 전율이 통하는 듯 했습니다.
순간순간 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잊을 수 가 없었던 지난날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주머니에게
인간의 탈을 썼으면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고 했습니다.
저의 중국에서의 생활을 너무도 잘 아는 아주머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며
우리의 정이 있어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곳 남한으로 시집을 온 딸의 초청으로 온다고 하니까
그런 부탁을 하더라면서
그 부탁보다는 제가 보고 싶어 왔다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16살, 어린 나이에 중국 시골에서 돼지. 오리 게 사니 닭과 소를 비롯한
많은 짐승도 기르고 엄마를 따라 다니며 농사도 하고
겨울이면 허리까지 차는 눈 속을 헤치며 나무를 해오던 저의 딸이
내일모레면 30살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대견해 했습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정말 저에게 있어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피맺힌 추억이 너무도 많습니다.
물살 빠른 검푸른 두만강 물에 세 번씩이나 빠져 몇 번의 죽을 고비에도
쉽게 죽을 수가 없었고,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는 오직 하나의 신념으로
4차에 걸치는 인신매매와 2차에 걸치는 강도 납치꾼들에게 납치되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면서도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 공안의 아슬아슬한 검문검색보다도
남편이라고 자칭하는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저에게는 더더욱 컸습니다.
오직 배고픔 때문에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에서의 타향살이는
그야말로 짐승보다도 못한 생활이었습니다.
고향이 평양이라 저는 농사라는 말도 잘 몰랐습니다.
솔직히 우리 아이들은 벼이삭도 열매처럼 나무에 달리는 줄 알고 컸고,
소와 말, 돼지를 보면 아주 신기한 동물로 알았습니다.
그런 제가 아침 6시부터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밭에서 살아야 했고
해가 지면 돼지죽을 끓여야 했고, 소 먹이를 기계에 썰고 개울에 나간 오리와 게사니 닭을 장에 몰아넣어야 했고, 오리나 닭이 한 마리라도 없어지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산에 매 놓았던 소가 풀려 달아나면 하염없이 날아오는 낫과 도끼 몽둥이를 피하며
찾아 헤매야 했고 달아나는 소를 잡아야 했습니다.
중국 남편은
여름 삼복더위에 김매기에서도 작은 풀이 하나 고랑에 있어도
참지 못해 저를 향해 뭐든지 던졌습니다.
밭갈이할 때 소 고리를 잘 잡지 못해 쩔쩔매거나
모내기철에 모를 꽂을 줄을 몰라 당황하거나
심지어 뱀이 무서워 고사리를 많이 뜯지 못한다고 할 때도
그 사람은 제게 낫이나 호미, 도끼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을 던졌고
가마뚜껑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왔습니다.
하도 젊은 시절 군생활로 단련된 몸이라
몸이 날쌔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이렇게
온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와 함께 이런 마음 아프고 가슴 쓰리던 추억을 더듬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은 지금도 그 버릇은 못 고친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오늘도 말도 모르는 타향에서 수모와 멸시를 받으며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을 우리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픕니다.
이들도 하루빨리 이곳 남한으로 오게 될 그날을 기원하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