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기획: 당신이 안 계신 동안] ⑤ “스페인서 1년 후 돌아온다고 했는데…”

구마모토-노재완 nohjw@rfa.org
2017.05.26
japaness_abduction_special_b 사이토 후미요 씨가 납치되기 전 동생 카오루 씨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RFA PHOTO/ 노재완

앵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사이 많은 일본인이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인 납치 피해 사건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는 납치 피해자들의 무사 귀국을 기원하며 공동기획 프로그램 ‘당신이 안 계신 동안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납치 피해자 마츠키 카오루의 누나 사이토 후미요 씨의 얘깁니다. 노재완 기자가 사이토 씨를 만나봤습니다.

사이토 후미요 씨를 만난 것은 지난 3월 27일.

취재진은 구마모토에 있는 사이토 씨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현관 앞 초인종 소리)

기자: 안녕하세요?

사이토: 네, 안녕하세요.

기자: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이토: 멀리서 와 주셔 고맙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구마모토는 납치 피해자 마츠키 카오루 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사이토 씨는 먼저 동생의 어린 시절을 얘기했습니다.

사이토: 누나들 밑에 남자아이가 하나였기 때문에 형제들 속에서 많은 추억이 있습니다. 전쟁 직후 열심히 살아야 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일하느라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면 제가 형제들을 혼자서 봐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카오루는 정말 말을 걸어도 대답이 ‘네’ 라든가 끄덕끄덕하기만 하는 그런 얌전한 아이였습니다. 때문에 누나들이 장난을 쳐도 화를 절대 내지 않았어요.

사이토 씨는 동생이 무척 근검절약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동생 카오루 씨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관련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사이토: 카오루는 가위로 자기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항상 더벅머리였어요. 집에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돈을 주면서 이발소 다녀오라고 돈을 건네면 감사하다고 받고는 그것을 쓰지 않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어머니한테 선물을 드렸어요. 어머니는 그걸 보고 곧잘 우셨어요. 착한 아이라고요.

카오루 씨가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입니다.

특히 어머니가 해주는 카레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이토 씨는 카레를 먹으면서 어머니와 동생이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던 모습을 기억했습니다.

사이토: 엄마가 만든 것은 싫어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카레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카레를 만들면 방글방글 웃으면서 “잘 먹겠습니다”하고 신나게 먹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우리 여자 형제들에겐 돈가스를 안 올려 주셨어요. 오로지 카오루 카레에만 줬어요. “카오루는 참 좋겠다” 하고 제가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오루 씨는 1980년 5월경 스페인 어학연수 중에 실종되었습니다.

그때 나이 26살이었습니다.

사이토: 부모님은 카오루가 대학교를 졸업하면 집에서 직장 다니기를 원하셨습니다. 카오루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저도 아버지와 카오루가 이런 말을 하고 서로 약속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습니다. 정말 아버지는 카오루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카오루가 납치되고 나서 얼마 후 돌아가셨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카오루 씨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의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이 사실을 바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사이토 씨도 상당 기간 동생의 실종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사이토: 가끔 친정 나들이를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현관에서 계속 들락날락하셨는데 원래 저런 분이 아니신데 그런 행동을 보이셔서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니까 그때야 동생의 실종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카오루 씨의 납치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그의 집안은 한순간에 어두운 골짜기로 변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치매가 심해지면서 사이토 씨는 남편과 상의 끝에 친정인 구마모토로 오게 됐습니다.

사이토: 동생은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치매 증상을 보이면서 배회도 시작됐는데요. 당시 정말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저는 자전거로 어머니를 찾으러 다니고 찾아서 집에 데리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물 한 잔 마시고 또 어디론가 나가버리곤 하셨어요. 그런 전쟁을 매일 치렀습니다.

사이토 씨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 매일같이 집을 나섰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는 당시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사이토: 좀처럼 본인의 외로운 마음을 표현하는 분이 아니셨는데 언제부터인가 ‘카오루는 어디에 있지?’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이젠 얘기를 드려야겠다 싶어서 “저기 바다 너머에 카오루가 있어요.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라고 말씀드렸어요. 이것은 배회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바다에만 가셨어요. 바다 쪽에서 동생이 올 거로 생각하신 거죠.

사이토 씨에 따르면 카오루 씨는 스페인에 가기 전 결혼을 약속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카오루 씨가 실종된 것을 알고도 10년을 기다렸습니다.

카오루 씨는 약속하면 반드시 지켰고 언제나 진실했습니다.

“동생의 이런 성격과 태도 때문에 여자 친구도 10년을 기다린 것 같다”고 사이토 씨는 말했습니다.

그 여성은 현재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카오루 씨의 무사 귀국을 기원하며 지금도 가끔 사이토 씨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이토: 지난번 동경에 갔을 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동생은 후지산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잠시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좋아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후지산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동생이 스페인에서 돌아오면 결혼할 계획이었습니다.

북한은 2002년 일본과 교섭 과정에서 카오루 씨의 납치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북한은 카오루 씨가 스스로 북한으로 가길 희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카오루 씨의 가족들은 북한의 이런 주장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이토 씨는 동생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을 벌일 때 무엇보다 동생이 자진해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했습니다.

사이토: 카오루의 성장 과정, 그중에서도 대학을 나온 과정, 일본에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알렸습니다. 특히 카오루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본에 돌아와야 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구마모토 주민들이 다 알아주십니다. 그래서 제가 시장을 보러 가도 꼭 제 어깨를 치며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꼭 납치문제 해결되어야 할 텐데”라며 “응원할 테니 힘내요”라고 말해주십니다.

실제로 카오루 씨는 스페인에서 실종되기 전 그의 아버지와 누나 사이토 씨 앞으로 2통의 엽서를 보냈습니다.

당시 보내온 엽서에서도 그는 1년간 체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사이토: 스페인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아버지 어머니를 잘 부탁드린다. 앞으로 열심히 1년간 공부하겠다는 엽서도 왔고요.

취재진은 사이토 씨의 최근 근황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동생이 궁금해 할 것 같다”며 자신의 하루 일과를 아주 상세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사이토: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어머니 단 앞에 있는 물을 갈아줍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손을 모아서 아침 보고를 합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카오루가 건강하게 있게 끔 엄마가 잘 봐 달라”고 말씀드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나이가 있으까 특별히 하는 일은 없고요. 요즘엔 몸 관리를 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장 카오루가 고향으로 돌아오면 저 밖에 봐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우선 제 몸을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이토 씨는 또 최근 구마모토 소식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특히 작년에 큰 지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구마모토 주민들이 큰 피해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사이토: 구마모토에서 큰 지진을 두 번이나 겪어 마음이 아픕니다. 안타깝게도 카오루 구출 활동을 위해 서명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중에는 돌아가신 분이 계시고요. 가족이 다친 분들도 계시는데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피해 지역에 나갑니다. 정말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지만 얼굴이라도 뵙고 건강하셨냐고 안부 인사를 합니다.

사이토 씨는 동생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적응력이 뛰어난 동생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사이토: 좋은 일 나쁜 일 어느 나라에도 있지만 너는 어떤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야. 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잖니. 자기 자신을 믿고 귀국하는 날을 기다려 주길 바란다.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 함께 힘내서 살아가자.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렇게 꼭 생각하길 바란다.

자유아시아방송과 일본 납치문제대책본부의 공동기획 프로그램 ‘당신이 안 계신 동안’,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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