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보험총회사와 서동명 (2)

김주원∙ 탈북자
2017.05.23
yeomyung_store-620.jpg 여명거리 준공식에서 공개된 여명거리 상점의 판매원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전 시간에 이어서 조선민족보험총회사 사장이었고 향산지도국 당위원회 책임비서였던 서동명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서동명은 김일성 빨치산 출신 서철의 아들이었습니다. 서철은 김일성의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렸던 김정일과 김영주, 김평일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김정일에게 힘을 실어 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랬던 만큼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로부터도 많은 믿음과 배려를 받았고 그의 아들 서동명은 1990년대까지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습니다. 조선민족보험총회사를 이끌던 시절 서동명은 국제적인 보험사기로 김정일에게 막대한 금전을 챙겨주었습니다. 1990년대 초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명단에는 조선민족보험총회사와 함께 총사장이었던 서동명의 이름도 올라 있었습니다. 유엔에 이름이 찍힌 제재 대상이어서 더 이상 대외활동이 어려웠던 서동명은 향산지도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향산지도국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밀자금을 관리하는 중앙당 38호실 산하의 외화벌이 기관이었습니다. 향산지도국 본부청사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우동에 있는 9층짜리 건물이었습니다. 건물 옆에는 수입품을 보관하는 물자관리소가 있었습니다. 향산지도국은 북한에서 종업원 3천명 이상을 거느린 1급기업소와 맞먹는 외화벌이 기관이어서 서동명의 직책은 일반 초급당 비서가 아닌 책임비서였습니다. 향산지도국은 북한에서 외화상점과 외화식당들을 운영했기에 수입품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당시까지 외화식당 접대원이나 외화상점 판매원은 북한 여성들 속에서 꿈의 직업으로 불렸습니다. 외화상점과 외화식당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뛰어나 웬만한 간부들은 눈만 마주쳐도 넋을 잃는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외국인들과 직접 마주치고 북한에서도 돈 꽤나 쓴다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고 있는 향산지도국 산하 외화식당과 외화상점에 직원으로 채용되려면 향산지도국 간부부의 심사를 통해 책임비서였던 서동명의 최종적인 결론을 걸쳐야만 했습니다.

미모의 여종업원들은 간부부를 책임진 향산지도국 당위원회 부부장이 일일이 선발했는데 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이나 지방의 예술단과 예술전문학교, 그리고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성들 수백 명의 명단을 가지고 먼저 인물심사부터 진행했습니다. 간부부를 책임지고 여종업원 선발의 인물심사를 직접 담당한 당위원회 부부장은 서동명의 측근 중에서도 가장 믿음이 가는 부부장이었습니다. 향산지도국 책임비서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서동명에게도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1995년이었는데 서동명에게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사건은 간부부를 담당했던 서동명이 제일 아끼는 부부장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사건의 발단도 북한의 간부들 속에서 늘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들과의 불륜관계였습니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습니다. 몸을 바친 대가로 외화상점과 외화식당에 취직한 여성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처해 자신들을 농락한 부부장과 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 평양 외화상점 판매원 여성 한 명이 부부장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하도 많은 여성들을 돌보자니 부부장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이 안됐나 봅니다. 외화상점 판매원 여성은 부부장에게 계속 만남을 요구했지만 끝내 외면을 당했습니다. 부부장의 행동에 판매원 여성은 자신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어차피 쫓겨날 바엔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는 식으로 이 판매원 여성은 대동강구역 보안부 담당보안원을 찾아가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담당보안원이 부부장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안원의 방문에 부부장은 길길이 날뛰며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안전성의 큰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 어느 보안부에서 담당이라며 보안원이 찾아왔는데 이 사람을 좀 손봐 달라’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담당보안원은 영문도 모르게 보안원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고지식하기로 소문났던 담당보안원은 부부장의 행위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몇 달 동안 부부장을 미행하며 결정적인 자료들을 차근차근 수집했습니다. 나중에 담당보안원은 그 자료들을 노동당 조직지도부 신소처리과에 직접 보고하였습니다. 보고 내용은 김정일의 주머니에 들어가야 할 달러가 향산지도국 간부들에 의해 줄줄이 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료를 받아 본 김정일도 노발대발 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사법기관을 관리하는 노동당 행정부와 중앙검찰소, 사회안전성 검열대가 향산지도국에 들이닥쳤습니다. 문제가 된 부부장의 집은 가택수색을 했는데 냉장고 2대와 텔레비젼(TV) 3대, 약 2만 달러 정도의 외화도 발견됐습니다. 여기에 외국의 색정(포르노)적인 비디오 테이프도 무더기로 쏟아졌습니다. 조사결과를 보고 받은 김정일은 향산지도국에 대한 검열을 확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결과 과장급 이상 간부들이 교묘하게 달러를 횡령한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간부들이 외화상점 판매원이나 외화식당 접대원들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아 챙기고 그들을 끼고 온갖 부화방탕한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지어 대낮에 본부 청사까지 여성들을 끌어들여 부화방탕한 짓을 저질러 왔음도 밝혀졌습니다. 평양에서 인물로 산다는 여성들은 죄다 향산지도국 간부들과 연계돼 있었습니다. 특히 향산지도국 당위원회 간부부는 지도원들에 이르기까지 매달 외화상점이나 외화식당 직원들로부터 수백 달러 어치의 뇌물을 받아먹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향산지도국 책임비서였던 서동명도 늘 중앙에 올려 보낼 긴급 자료를 써야 하니 외화성점의 누구를 사무실로 보내라는 식으로 때 없이 여성들을 불러들여 관계를 가져왔다는 내용도 말단 직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두 폭로되었습니다. 그동안 향산지도국의 힘없는 직원들은 간부들의 부패한 생활실태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막강한 권력 앞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향산지도국이 밀쓸이(싹쓸이)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평양시 주민들 속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격노한 김정일은 당장 향산지도국을 해산하고 달러를 횡령한 간부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여 1995년 말 향산지도국의 과장, 부부장급 이상 간부 21명이 공개 처형되고 많은 간부들이 숙청되었습니다. 1995년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시기여서 북한의 인민들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지방은 길거리에 시체들이 방치돼 있었고 하룻밤만 자고나면 누군가 또 굶어 죽었다는 소식에 주민들 모두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실 향산지도국에서 있었던 불법행위들은 당시 북한의 어느 분야라 할 것 없이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만연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향산지도국 간부들을 제물로 삼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향산지도국은 몰락했지만 그 속에서 유독 탈 없이 목숨을 부지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빨치산 출신 서철의 아들 서동명이었습니다. 김정일이 향산지도국 책임비서였던 서동명을 아껴서 살려 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제적인 사기까지 쳐가며 자기 배를 채워준 서동명을 앞으로도 써먹을 기회가 있으리라 타산해 목숨을 살려 둔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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