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의 추억 (2)

서울-문성휘, 김태산 xallsl@rfa.org
2017.10.13
telephone_booth-620.jpg 90년대 평양의 공중 전화박스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안녕하십니까?

김태산: 네, 오랜만입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낙후하나 이런 게 간접적으로 드러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광주인민항쟁?” 북한에서는 민주화 항쟁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광주인민항쟁”때의 장면들을 보며 북한 사람들 엄청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그게 1980년대죠? 네, 80년입니다.

기자: 네, 그때 우리가 엄청 놀라지 않았습니까? 우린 그때에 남조선(한국)은 정말 못 산다고 들었는데 보니까 서울도 아니고 광주라는데 아파트가 다 있고, 그리고 버스가 다 다니고, 대학생들이 다 시계를 차고, 그때 그 시계가 정말 멋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같은 신발 그때에 벌써 시위자들이 신고 있었어요.

김태산: 그때 청바지 다 입고 신발 다 신고 옷이랑 다 좋아보였어요.

기자: 그때 북한에선 그런 신발을 “슈즈”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런 신발을 다 신고 있어서 굉장히 놀랐는데 전화도 비슷합니다. 80년대 광주인민항쟁이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북한이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는 영화를 내놓지 않았어요. 그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보면 외부 전화박스에 들어가 전화를 하지 않습니까? 주인공 유림이가 손으로 숫자판을 빙빙 돌리고 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야, 저때 벌써 남조선은 저런 전화를 썼냐고?” 우리가 깜짝 놀란거예요.

김태산: 그렇죠. 그때 벌써 전화박스에 들어가 외국과 전화를 하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북한은 전화감청을 다 하고 전화를 꼭 통제 하에서만 했는데 저도 그때 보면서 “저거 외국인이 들어와 전화를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네” 그게 ‘6.25 전쟁’을 그린 영화인데 그때 당시에 한국에서는 그렇게 전화를 했다는 자체를 보고 우린 사실 쇼크를 먹었죠.

기자: 아, 그리고 그때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 번호판을 돌리는 게 전화번호라는 걸 모르고 옛날에 그 자가발전을 하는 왱왱 돌리는 그런 전화 있지 않았습니까? 그걸 좀 발전시켜서 이렇게 빙빙 돌리게 만든 줄로 알았거든요. “아, 자가발전 식을 발전시켜 저렇게 빙빙 돌리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김태산: 아, 그때 80년대에는 제가 평양에서 공부를 하고 중앙기관에서 근무했으니깐 중앙기관들은 그런 전화를 다 썼거든요. 숫자판을 돌려서 혹은 번호판을 눌러서, 말하지면 교환대를 거치지 않고 생대와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나오는 영화 장면을 보며 “야, 우린 이제 저런 전화를 쓰는데 ‘6.25 전쟁’ 때 말하자면 50년대에 벌써 한국에서는 저런 전화를 썼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기억을 다시 떠 올리니 감회가 새롭네요. 다는 걸

기자: 북한에서 교환수들이 없어지는 것 동시에 숫자식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때 광케이블 선을, 이걸 ‘빛 섬유 전화’라고 했죠. 그 빛 섬유 선이라는 걸 지방마다 깔고 어느 날 갑자기 교환수들이 다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때 교환수들 막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한참 무슨 건설을 하는데 교환수들을 건설장에 보낸다, 어쩐다 해서 교환수들이 막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실제 교환수들을 모두 건설 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있으니 다 돌아오더군요. 어차피 그런 여성들은 다 힘있는 집안의 자식들이니까 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교환수가 없어지니까 이제부터 전화를 하는데 전화번호라는 게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때 난 전화번호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았는데 “아, 이 전화기를 분류하기 위해서 전화번호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예하면 이건 식료공장 전화다, 이런 걸 표시하기 위해서 어디면 102번, 이렇게 번호를 매겨 놓은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교환수들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젠 전호번호라는 걸 눌러야 한다는 겁니다. 교환수들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번호판이 없이 들던 전화는 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아, 이거 황당하죠. 그때 내가 고정 전화를 거는 데가 있었거든요. 나하고 좀 거래가 있는 곳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곳의 전화번호를 모르면 전화를 못 건다는 거예요. 지배인이 “야 거 전화번호 뭐냐?” 하는데 “전화번호라는 게 뭡니까?” 하니깐 “야, 너 지금 전화를 하겠다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모르냐?” “모르는데요.

여태껏 교환에다 말하면 다 찾아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야, 이젠 교환수가 없어지면 전화번호를 눌러야 통화할 수 있어”라는 겁니다. 이거 굉장히 복잡하더라고요. 그 빛섬유(광케이블)을 깔면 지방에서 평양까지도 전화가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실제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생각한건 “이이고 이젠 머리가 다 터지겠구나, 그 많은 전화번호를 다 적어가지고 다녀야 하냐?” 그리고 빛섬유 전화를 놓은 초기, 1992년도에 말입니다. 사람들마다 전화책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어요.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 사람들이 일하는 공장 전화번호를 쭉 적어놓는 겁니다.

김태산: 그렇죠. 그때 전화번호 수첩이 다 있었죠.

기자: 지금 여기는 명함장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북한은 명함장이라는 게 없으니깐 그 전화번호를 잔뜩 적어놓고 그때 전화번호 노래집하고 전화번호 수첩은 꼭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그렇죠. 저는 60년대부터 군수공장에서 복무했으니까 그때 교환대가 있었는데도 우린 전화번호를 썼어요. 왜냐면 이게 수자식 전화번호는 아니지만 군수공장은 다 비밀과 관련해서 군수공장이 이름이 네 가지가 아닙니까. 군사번호가 있고 일반 번호가 있고 또 공작기계 이렇게 네 가지가 있었거든요.

기자: 정밀기계, 이것도 모두 군수공장이었죠.

김태산: 그렇죠. 시내(마을, 도시)에 나가서 내가 우리 공장에 전화를 하려고 “독로강공작기계공장을 찾아주세요”하면 교환수들이 “그런 공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모르는 거죠. 우리공장이 전화번호가 105번이였거든요. 어디 시내에 나가서 “105에 좀 전화주세요”하면 딱 연결해 주는 겁니다. 우리공장의 코드번호가 105번이었으니까.

공장에서도 내가 사로청(청년동맹) 사업을 할 때 책상위에 전화번호 책이 다 있었어요. 그래서 “당비서 좀 대달라, 지배인 좀 달라” 그러면 교환수들이 “안됩니다”라는 거예요. 교환수한테 전화를 들고 “교환이지? 1번 좀 달라” 1번이 지배인이거든요.

2번이 기사장, 직장도 1호 직장은 30번, 2호 직장은 60번, 이렇게 비밀과 관련해서 교환수가 있었지만 우리는 전화번호를 다 썼어요. 군수공장만은 그때 전화번호를 썼고 제가 80년대 들어서 대학에 올라가니까 평양시에서는 이자 선생이 말한 것처럼 전화번호를 쓰더라고요. 그러니까 지방은 좀 늦게 됐죠.

기자: 네, 한국에서 “응답하라 1994” 이런 드라마를 보면 그때 한국 사람들은 다 (가정용) 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린 그때 녹음기도 정말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때 한창 일반적으로 보급되던 게 기타였습니다.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가사를 모르니까 노래수첩을 만들어서 자기가 원하는 노래를 다 적는 겁니다.

그 노래수첩 아주 요란했죠. “태양을 조명으로, 지구를 무대로, 자연을 배경으로, 부르자 나의 노래 혁명의 노래를” 맨 앞장에 다 그렇게 써가지고 여하튼간 노래수첩을 꺼내면 맨 앞엔 무언가 자기만의 매력이 나타나는 그런 게 있었습니다. 그런 걸 적고 그 다음에 자기가 원하는 노래들이 몇 페이지에 있다는 차례를 만들고, 그런 게 있었고 그 다음에 92년도가 되니까 수첩이 하나 더 늘었는데 이게 지금 말하는 전화번호 수첩입니다.

이걸 들고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1999년 “고난의 행군”이라는 게 북한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선 북한이 어느 만큼 못 살았고 낙후했는가를 실제 북한 사람들은 그때 깨달았거든요. 그리고 99년도부터 개인들이 가정용 전화를 놓기 시작한 겁니다.

99년이 되니깐 “아무개 네는 돈을 얼마나 들여서 제 개인 집에다 전화를 놓았다” 그땐 그게 대단한 걸로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2002년도쯤이 되니까 힘 있는 사람들은 전화를 놓을 수 있다. 전화 제한이 없다, 그렇게 되었고 그때 중국인민폐 120위안 그렇게 있어야 전화를 놓는다, 중국인민폐 120위안이라는 게 작지 않은 돈이었거든요.

김태산: 그렇죠. 웬만한 집들에선 상상도 못하는 거죠.

기자: 네, 더욱이 그 시기에 중국인민폐 120위안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돈이었죠. 그렇게 하면서 개인들이 전화를 놓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보니까 정말 북한의 전화 역사라는 게 너무 슬프다…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 정말 좋은 얘기 많이 나누었고요.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

기자: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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