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났습니다. 상대방이 '언니, 나야 희순이야' 하고 이름을 밝히자 그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몇 년 전 중국 변방대 감옥과 북한의 무산 보위부 감옥에서 많은 사람을 웃겼던 바로 그 친구, '희순'이었습니다. 그 때 그에게는 10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향은 평남도 개천군에서 아들과 단둘이 살았습니다. 모자는 생계를 하루하루 연명하기가 힘이 들어 량강도에 가면 언 감자라도 캐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수 없이 걷고 또 걸어 탈진 상태로 량강도 목적지에 도착도 하기 전 함흥 역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중국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돈도 많이 번다는 말로 희순이 모자를 꼬였고 귀가 쫑긋해진 희순은 그 낯모를 여인을 따라 두만강을 넘었답니다.
사실, 두만강인지 무슨 강인지도 모르고 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꾼들에게 넘겨졌고 9살짜리 어린 아들을 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희순이는 산둥성으로 팔려갔고 아들은 두만강 연선 조선족 집에서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은 희순이에게 안쪽으로 가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어린 아들을 공부시켜 준다는 뻔한 거짓말을 했지만, 희순이는 이 말에 속아 아들을 남겨둔 채 혼자서만 산둥성으로 갔던 것입니다. 조선족 집에 남은 아들은 공부는 커녕 낯선 이국땅, 남의 집 문턱에서 이제나저제나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한편, 팔려간 희순은 말도 통하지 않는 산둥 한족 사람에게 시집을 갔지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랐답니다.
그저 몇 날 며칠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눈에 눈물만 흘리고 흘렸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놀려 주는지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답니다. 희순이는 변방대 구류장에서 이때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정말 그 땐 말이 통하지 않으니 창피도 수줍음도 몰랐다면서 자기 흉내까지 내 가면서 얘기해 주는 통에 우리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습니다.
피지도 못하고 크지도 못해, 그때 희순의 9살 난 아들은 5-6살 되는 어린 아이 같았습니다. 우리가 북한으로 북송되던 날, 희순과 아들아이는 농구방차에 족쇄를 손에 채운 채 북한 무산 보위부로 함께 끌려갔습니다. 아이 손이 얼마나 작았던지 족쇄가 맞지 않아 엄마의 손과 함께 끈으로 한쪽 팔을 묶어 잘 걷지도 못하던 그 모습이 이 생생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 생각이 나서 우선 아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청진 집결소를 걸쳐 평안남도 개천까지 가는 동안 어린 아들이 병에 걸려 그만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어린 아들마저 죽고 희순이도 따라 죽으려고 했는데, 목숨이 왜 그리 질긴지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간 희순은 노동 단련대에 끌려가 생활하다가 그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 알게 된 한 친구를 만나 이곳 남한까지 오게 됐다고 눈물을 흘리며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탈북자들 누구 하나 마음 안 아픈 사람 없고 가슴 찢어지지 않는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비극에 또 비극 같은 이런 사연들은 책을 써도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헤어지면서 희순에게 그 생명의 은인인 친구와 함께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술도 한 잔 기울이며 지난 회포를 함께 나누자고 말입니다. 서로서로 외로울 때면 만나 외로움도 달래고 고향에 대한 추억도 하자고 말입니다.
부디, 희순이 마음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서울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랍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