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친구의 쓸쓸한 가을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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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윤중로를 찾은 시민들이 낙엽을 밟으며 가을정취를 누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늦가을 바람에 날려 떨어진 노란 단풍잎들이 거리마다 마을마다 수놓은 것처럼 예쁘게 깔려 있습니다. 아침 출근길과 저녁 퇴근길에 단풍잎들을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귓전에 들려옵니다. 그러면 제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쓸쓸해지곤 합니다. 때로는 그 소리가 싫어 가랑잎이 없는 땅을 밟기도 하고 때로는 떨어진 예쁜 은행잎들이 상할까 두려운 마음에 가랑잎을 피하기도 합니다.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조금 늦은 퇴근길, 나뭇가지 위에 남아 있던 은행나무 잎들이 늦가을 비바람에 수없이 날리며 떨어지고 있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신정네거리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공원에는 갖가지의 아름다운 색깔을 가진 쑥국화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앞서가던 친구 인실이가 조용히 돌아보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한참이나 꽃을 바라보고 서있는 저를 불렀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꾸 없이 서있는 저를 보고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냐며 달려와 흔들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저는 그 친구에게 이 쌀쌀한 저녁 찬바람에 못 이겨 가랑잎들이 눈 오듯이 모두 떨어지고 있는데 보란 듯이 활짝 핀 저 쑥 꽃이 마치 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 하다고 뜬금없이 말했습니다. 순간 그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친구와 저는 한참이나 길거리 작은 공원주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한참이나 생각에 빠졌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 중 영문을 모르고 우리를 힐끗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신이 든 저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친구와 함께 중국식 양꼬치 구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안면이 있는 사장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구워 주는 양꼬치에 소주 한 잔이 들어가자 친구는 큰 소리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잔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한참 눈물을 흘리던 친구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5년이 된 친구는 5번째로 맞는 쓸쓸한 가을이라고 했습니다. 쌀쌀한 늦가을 저녁인데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피어 하루 종일 회사일로 피곤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있는 꽃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더 쓸쓸해져 눈물이 울컥 나왔다고 했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들과 사랑하는 남편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군에서 제대했을 아들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소식이 없고 북한에 있는 남편은 다른 여인과 새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들만 제대하면 아들과 함께 남편을 무조건 데려 올 생각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고향이 황해도이기 때문에 연락하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쌓인 감정을 풀 겸 노래방으로 갔습니다. 저도 이곳 한국에 온지 8년이 넘었지만 노래방에 단둘이 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우리 둘은 목청껏 소리도 지르고 둘이 부둥켜안고 큰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웃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여태까지 쌓이고 쌓였던 마음의 상처와 감정들이 조금 치유가 되는 듯 했습니다.

3차로 우리 둘은 커피 집에 들어가 조용하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시켰습니다. 저는 워낙 늦은 밤에 커피는 안 마시지만 그날따라 커피 맛과 향이 아주 좋았습니다. 자식 이야기로 시작해 해 놓은 일 없이 나이만 먹는 것이 안타깝다는 등 흘러가는 세월과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서 이제 40번 잠들었다 눈뜨면 또 한 살 먹는다는 등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이 좋은 세월 속에서 자꾸 나이 드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쓴맛 단맛 다 겪으며 여러 번 두만강의 거센 물결에 떠내려 죽을 뻔하면서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한다는 각오로 찾아온 저였지만 고향에 자식을 두고 온 친구보다는 너무도 행복한 삶이 아닌가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두고 온 아들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나마 저는 고향에 있는 친척들과 연락도 하고 작은 마음이라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친구는 아무 소식도 전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아픔은 단지 그 친구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닙니다. 2만 5천 명 우리 탈북자들 모두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고맙다며 비록 친언니는 아니지만 이렇게 속을 툭 털어놓고 저에게 허물없이 응석을 부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좋은 주말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꼭 잡은 뒤 각자 상행선과 하행선 지하철 전동차를 탔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저는 친구의 쓸쓸한 마음이 곧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기를 다시 한 번 기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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