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모내기 전투의 추억

이곳 남한도 한창 모내기 철입니다. 벌판에서는 모내기 기계들이 부릉부릉 분주히 돌아가기도 하고 빠른 곳에서는 벌써 모내기가 끝나 벌판이 온통 파란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쯤 내 고향에도 한창 모내기 철이라 직장인들도 가두 여성들도 학생들도 군인들도 모내기에 총동원되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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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오랜만에 고향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모내기를 하고 왔다면서 장사를 못해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야단이라며 모내기 총동원이라면서도 먹을 것은 한 줌도 주지 않으니 속이 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엔 돈을 내고 모내기에서 빠져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빠지면 조직에서 비판받지 않는가 하고 걱정스러운 말로 물었는데, 괜찮다고 했습니다.

저도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면서, 해마다 농촌 동원이 제기될 때면 정말 힘들었습니다. 당 조직과 행정에서는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100%, 모내기를 비롯한 농촌 동원에 참여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집행을 못 하면 1년 내내 당 생활 총화에서 비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식량 사정이 악화하면서 인민반장인 저도 또 가두 여성으로 구분되는 다른 주부들도 모두 남편들과 자녀를 위해 점심을 못 먹는 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밥 못 먹는다고 나가서 일을 안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저는 안전부, 보위부, 군인 가족에게는 쌀이나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집에서 아이들을 몇 명씩 맡아 아이를 봐주게 하고 그 돈과 쌀로 농촌 동원 나가는 사람들에게 곽밥 그러니까 도시락을 싸주게 했습니다.

북한의 농사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농장원은 지도 농민'. 농사꾼들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가 동원된 학생이며 직장인들이 모내기, 김매기에 대해 뭘 그리 잘 알겠습니까? 농장원은 동원된 학생들과 직장인들을 따라다니면서 벼 꽂는 법이라든지 김매기라든지 영양 단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지도 농민'이었습니다.

동원 나온 인민학교 어린 학생들은 강냉이 영양 단지를 옮기라고 하면 넓은 벌판에서 졸지 않으면 공놀이를 하고 놀거나 물 길러 다니기가 힘들다고 '양동이'를 집어던지고 놀기가 일쑤였습니다. 하긴 그 어린것들이 농사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하기에 농장원이 회초리를 가지고 따라다녀야 겨우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 북한에서는 부모가 농사꾼이면 대대로 내려오면서 자식들까지도 농장원이 되어 죽을 때까지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심고 하며 땅을 지켜야 합니다. 하기에 처녀들은 군관들에게 시집을 많이 갑니다. 그러면 훗날 자식들은 자기들처럼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외할아버지도 양덕군 맹산 산골에서 한평생을 농사로 강냉이밥을 먹다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항상 흰 쌀과 흰 밀가루를 가지고 외할아버지 집에 갔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군인이라 쌀 배급과 밀가루 배급을 타면 어머님은 항상 외할아버지 생각에 당신 몫을 먹지 않고 아껴 외할아버지에게 보내곤 했었습니다.

우리는 강남군에 자주 농촌 동원을 갔습니다.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에는 미나리와 물쑥, 사라귀를 뜯느라 쉬지도 못합니다. 뜯어온 나물을 저녁에 집에 와서 살짝 데워 묻혀서 저녁상에 올리면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이 기뻤습니다. 그나마 힘든 농촌 동원에서 우리 엄마들의 작은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이곳 남한의 모내기 철, 논은 바쁘지 않습니다. 동네 젊은이들은 서울이나 큰 도시로 모두 나가고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이 남아 있지만 거의 모든 농사를 기계가 하기 때문에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벌판에는 기계 한 대가 돌아갈 뿐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이런 한가한 농촌 풍경을 보면서 가끔 저는 오늘도 밥 한 끼 배불리 먹지 못하고 뙤약볕에도 온종일 허리를 굽히고 있을 고향의 친구들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