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되살아난 증산 교양소 악몽

2008-07-21

며칠 전 저는 탈북자 동지회 게시판에 실린 한 탈북 여성의 눈물 나는 사연이 담긴 글을 녹음된 것으로 듣게 됐습니다. ‘증산에서의 죽음의 나날’이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그 탈북 여성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했다는 죄 아닌 죄로, 동생이 평남도 증산군에 있는 노동교양소에 끌려왔고 그곳에서 배고픔을 참다못한 동생이 눈에 보이는 한 뿌리의 냉이 풀을 뜯어 먹었는데 감독이 달려와 냉이 풀을 흙 채로 동생에게 강제로 먹였고 그로 인해 설사를 앓던 동생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감독하는 선생도, 안전원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우리와 말도 통하지 않고, 피부색도 전혀 다르고, 북한 당국이 그토록 철천지원수처럼 미워하는 미국 사람들도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우리 북한 200만 인민들이 굶어 죽어나가는 모습과 처참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눈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말도 통하고 정서도 통하는 같은 동포에게 어떻게 흙을 먹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인간에 의한 인간 말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증산군에 있는 교양소만이 아니라 북한내 교양소나 교화소 내의 현실입니다.

더 끔찍한 것은 소위 꽃동산이라는 묘에는 5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덩이에 20명의 시체를 묻고, 허술하게 묻힌 묘 주변에는 교양소에 있는 개들이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기도 한다고 합니다.

‘증산군의 11호 노동교양소의 꽃동산 묘지 주변에 사람들의 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그 속에 아내를 애타게 기다리다 굶어 죽은 내 남편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니 온 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사랑하는 가족과 생리별을 하고, 오늘 올까, 내일 올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겨우겨우 생계를 부지하며 살다가 이곳 남한에서는 죄로 인정도 안 되는 죄 아닌 죄로 증산군 노동교양 소에 끌려가 필자의 동생처럼 굶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느라 한잠도 못 잤습니다.

1997년 우리 가정에는 돌연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평양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도강이 뭔지 탈북이 뭔지를 모르고 살던 우리 가족. 큰 딸이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오직 자식을 찾아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뒤에 있는 가족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저는 눈물의 강,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자식의 손을 잡고, 딸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간다는 희망으로 두만강을 넘었지만 다시는 고향으로 갈 수 없는 탈북자의 신세가 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두 번의 북송에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 내가 나서 자랐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 평양으로 갈 수가 없었고, 11로 교양소로 보낸다는 서류를 보는 순간 내가 탈출해야 다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은 딸을 단련대에 둔 채로 나 혼자 탈출을 시도해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는 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다시 저는 피눈물을 뿌리며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 후로 저는 다시는 내가 나서 자랐고, 정든 집이 있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 고향으로 영원히 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저는 세월이 흘러 피나는 노력 끝에 아들을 찾아 중국으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지만, 한 발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남편이 증산군에 있는 노동교양소에서 1년 만에 굶어죽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아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고향에 남은 남편과 아들은 준비해 놓은 식량이 떨어지자, 남편은 낮에는 직장에 출근을 하고, 저녁에는 장마당에 출근을 해도 두 목숨을 부지하기도 무척 힘들었답니다. 때로는 직장을 출근을 하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장마당에서 술장사 담배 장사를 조금씩하며 가족을 만나게 될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무단결근이라는 죄와 시장에서 당원이 장사를 했다는 죄로 증산군에 있는 11호 교양소에 가게 됐고, 1년만인 2000년도에 굶어 죽은 소식조차 간리 9호소에서 하루하루를 1년 맞잡이로 아빠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모를 사람이 찾아와 “성일아! 너의 아버지는 교양소에서 굶어 죽으며 힘없이 자기의 손을 꼭 잡고 아들에게라도 알려 달라고 했는데 이제야 찾았다”고 하면서 슬픈 눈물을 보이며 아빠의 죽음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7년 만에 만난 아들은 너무도 어린 나이에 엄마도 누나들도 잃게 되었고 한 줄기의 희망이었던 아빠마저 잃게 되자, 그 충격으로 한 달 동안 앞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슬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로 몇 시간을 우는 이 엄마를 마주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묵묵히 앉아만 있던 여윈 아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잃었던 두 자식과 두 눈 뜨고 빼앗겼던 한 명의 자식과 함께 이곳 남한으로 오는 내내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남한에 와서 이런 저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이제 저는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탈북자들을 만나거나 그들의 사연을 접하거나 할 때면 오래된 상처가 도지듯, 떠올리기 싫은 옛날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이 저며 옵니다.

그리고 이곳 남한에서 아무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제 생활에 더 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곤 있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지 못함을 사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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