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가발공장 직공에서 하버드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의 억척 삶의 이야기① 희망을 품으면 희망이 다가온다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1.07.29
1999년 한국을 강타한 책 한 권이 있다. 책에 대한 입소문이 바람처럼 퍼져 인기도서 1위를 기록했다. 이 책은 유명 문학인의 작품도, 유명세를 떨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도 아닌 아주 평범한, 그래서 혹 낯설기도 한 한 여성의 자전적 수필이다.

dr_seojinkyu-200.jpg
2006년 하버드 대학 졸업식의 서진규 박사.
사진제공-서진규 박사
책의 제목은 이렇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40만 가까운 독자들이 이 책에 열광했고 한국의 모든 대중 매체가 이 여성에게 초점을 맞췄다. 서진규 박사, 한국인이면서 미군이었던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 가장 슬픈 이야기를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 죽음에 직면한 모든 이에게 새로운 삶을 인도했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가발공장 직공에서 미국에서도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의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의 억척 삶의 이야기 1부, 희망을 품으면 희망이 다가온다를 함께한다.

서진규 박사는 진흙투성이의 벼랑에서 희망의 메시지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서진규 박사의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는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가난에 찌들게 살았다. 그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생활을 들어보자!

서진규: 저는 셋째 아이로 태어났지요. 아버지가 엿장수 짐을 등에 짊어지고 엿 파는 가위 소리를 내면서 거리에서 엿을 팔다가 조금 자리를 잡자, ‘원래’라는 어촌, 거기서 엿장수를 하시는데 굉장히 가난했지요. 그런데 제가 태어나기 전 몇 달 전부터 어머니가 앓아누우셔서 집안 식구들이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친할머니가 오셔서 집안일을 봐 주시면서 (제가 태어날 때) 저를 받으셨는데 그 당시에는 가시나(여자)라면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데, 집안 식구들이 고생하면서 태어난 게 가시나여서 제가 시련을 많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진규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 따라 오빠와 함께 미역 따러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고한다. 호기심도 많은 소녀였다.

서진규: 제가 4살인가 5살 때 부산으로 이사 갔는데 2번이나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거든요. 그랬을 때 2번째 빠졌을 때 기억이 나요. 할머니가 미역 따러 가셔서 오빠와 저를 바다 안의 큰 돌에 앉혀놓았는데 바다 안을 보니까? 물도 맑고 물고기도 다니고 해서 오빠한테 깊지 않은 것 같은데 하고 보자 하면서 팔짝 뛰어들어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 외에는 바닷가에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영화를 처음 봐서 사람들이 행진해 우리 쪽으로 오니까? 우리 잡으러 온다고 도망갔던 그런 기억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어요.

지금은 하버드 대학의 박사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꼴찌를 면치 못했으며 아버지의 노름과 술장사하는 엄마를 원망도 했다.

서진규: 제가 초등학교 학년과 4학년 중간에 부산에서 제천으로 이사를 갔는데 부산에 있는 동안에는 제가 1, 2, 3 학년 때 꼴찌에서 1등을 한 것 같아요. 공부도 전혀 못하고 아침반 오후반 분간도 못 해서 아침반인 줄 알고 가보면 우리 반은 오후반일 때가 참 많았고, 그래서 결석도 많이 하고 집에서 걱정할 정도였어요. 혹시 정신 박약아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할 정도였는데 제천으로 이사를 가서도 처음에는 계속 바보 같아요. 그랬는데 아버지가 돈을 잘 못 버시는데다 노름 끼가 있어서 결국 엄마가 술장사했어요. 그 술장사를 한다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 창피한 생각만 해서 공부도 못하는 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겁쟁이였던 서진규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에서 가시나라는 차별과 술장사 딸이라는 주변의 비웃음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진규: 6학년 되던 해에 우리 언니를 시집보내고 나니까? 큰딸이 없으면 작은딸이 해야 된다고 해서 집안 살림을 제가 다 하게 되지요. 저는 원래 게으른 아이인데 집안 일을 못한다고 말을 못 하지요. 어머니가 엄청 엄했기 때문에 조금만 싫다고 하면 그대로 매질을 하던 엄마였으니까? 제가 겁쟁이였거든요. 그래서 못한다는 말을 못하면서 하기 싫은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바보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어요. 왜 오빠도 있는데 가시나라고 내가 해야 하는가! 하는 차별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이 술장사 딸이라고 멸시하는 것을 진짜 느끼게 되면서 거기에 대한 분노, 그래서 그때부터 아마 분노, 반항 오기, 이런 것이 제 몸속에서 잠을 깨고 그것이 서진규를 성공하는데 아주 기초가 되는 그래서 제천으로 이사를 안 하였으면 아마 서진규는 바보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서진규 씨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봐 주신 손금의 마력은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가정에서 차별 속에 기댈 데 없고 믿을 데 없던 그녀는 분노를 느끼면서 속상해하던 때 손금 하나가 바로 희망으로 키워져 간다.

서진규: 시험을 보는데 담임선생님이 심심하셨던가 봐요. 아이들 손바닥을 보시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도둑이 제발 제린다고 제가 원체 더러웠기 때문에 손도 트고 손톱에 때도 있고 해서 틀림없이 걸렸다 하고 겁을 먹고 있는데 오시더니 제 왼쪽 손을 보시더니 아주 깜짝 놀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더니 한참 자세히 보시고는 나중에 교무실로 부르시더라고요. 그래 갔더니 선생님들한테 아 이녀석 손바닥에는 성공 금이 있다고 이 녀석은 나중에 큰 인물이 될 놈이라고 그렇게 장담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뭐 매달릴 게 없는데 더구나 선생님은 시골에서는 하나님이었지요. 그런 선생님이 내가 큰 인물이 된다니까? 그때부터는 현실의 초라함을 좌절할 때마다 저는 손금 들여다보면서 아니야! 나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꺼야! 선생님이 장담했어! 이봐, 손금이 있잖아! 이런 식으로 이 손금을 지금도 힘들 때는 하나님 믿으면서도 손금 들여다봐요! 손금이 점점 길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야! 내가 아직도 꿈을 꿔도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겁쟁이, 가시나라고 천대 받던 그녀는 부모를 잘 설득해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얻는다. 아니 이것은 기적이었다.

서진규: 작은아버지가 한국군 대령이었지요. 서울에 살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해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는데 먹는 것과 학비도 도와주셨지만, 용돈은 없었지요. 그때만 해도 어릴 때 꿈이 박사가 되어서 정의의 사도가 되는 것 이었기 때문에 그 꿈을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돈 필요한 것은 영어 잡지를 팔기도 하고, 가정교사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용돈 벌고 공부를 했는데, 그 당시 아무래도 힘은 들었지요. 작은 집은 조금 부자였기 때문에 그런 비교도 되고, 친구들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도 되고, 그러면서 좌절하면서도 항상 제 손금도 들여다보고 미래에 대한 기대, 성공해서 박사가 되어서 정의의 사도 돼서 세상을 돕고 돌아다니는 이런 상상을 많이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3학년 졸업할 때는 반장도 했어요. 그래서 그때가 꿈많던 시절이었지요.

서진규 씨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에 갈 가정 형편이 되지 않아 가발공장의 직공, 식당 일등 닥치는 대로 삶의 전선에서 박사가 된다는 꿈과는 점점 멀어졌다.

서진규:제가 고등학교까지는 박사가 되어서 정의의 사도가 된다는 꿈에 들떠 가지고 웬만한 어려움은 다 이겨낼 수 있었는데 졸업하고 나니까? 대학을 갈 정도의 가정형편도 안 되고 또 제가 좀 바보 같은 면이 있잖아요. 자기가 스스로 고학할 줄도 모르고 좋은데 취직할 줄도 모르고 결국은 가발공장 직공 그리고 거기서 겨우 헤어난 게 관악산 골프장 식당 종업원, 또 미국 사람 집 식모, 이런 일을 하게 되니까? 인제는 꿈이 사라지려는 거지요. 박사가 되려면 공부 잘하고 대학을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저는 지금 가발공장에서 가발 만들고 있고, 식당에서 구박받으면서 일하는 이런 사람이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손금에 매달리면서도 그 힘이 많이 따라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는 거의 암흑시대 같았지요.

서진규 씨는 당시 용기가 없어 자살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고난이 오늘 행복의 가장 큰 원천이라고 설명한다.

서진규
: 뭐 자살도 생각해보고 별생각 다 해봤지마는 결국 그 당시에 자살하지 않도록 도움이 됐던 것은 제가 겁쟁이잖아요. 자살에도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자살을 못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그냥 버티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그때 고생했던 그것들이 다 성공하는 데 엄청난 높이를 높여주고 또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데 그 젊은 시절에 고난이 지금은 오히려 설득력이 있고 도움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서진규 씨는 자신을 뒤돌아 볼 때 환경보다는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는 것이 바로 꿈을 이룬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서진규: 지금의 이뤄진 것을 보고 사람들은 서진규는 특별했다. 특별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그 당시의 서진규는 사람들이 아무도 기대를 안 할 정도로 너무도 평범했었어요. 근데 그런 속에서 아까 말씀드렸지마는 자살을 할 수 없었던 게 겁쟁이가 돼서 못 죽었던 거고, 그래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대로 순간순간을 버티고 왔는데 그때 아마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연민, 자신을 돌아봤을 때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왜 내가 언제 가시나로 태어나라고 해 본 적도 없고, 가난한 집안에서 술장사의 딸로 자라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해 본적이 없고 내 선택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 너무 불쌍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신이 너무 불쌍하니까? 제 꿈은 정의의 사도이니까? 남을 도와주기 전에 내가 나를 먼저 구제해줘야 된다는 그런 생각, 그게 아마 굉장히 큰 힘을 발휘했고, 또 쓰러질 때마다 자신의 비참함을 현실화시키는 사회, 나를 괴롭게 하는 그런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분노 반항 이런 것들이 내가 언제가는 성공하고 말 거다 두고 봐라! 내가 언젠 가는 성공해서 잘못된 이 세상을 바로 잡고 말 거다. 그런 오기, 이런 게 바로 서진규에게는 지혜가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꿈을 놓지 않고 그대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창의력, 혁신적인 생각, 상상력 이런 게 엄청나게 남들보다 뛰어나게 되는 훈련과정이 됐던 것 같아요.

서진규 씨는 그렇게 불행한 어린 시절이지만 그래도 고향의 향수가 있다.

서진규: 제가 제천에 살 때 한여름 밤 마당에 평상 펴고 누워 하늘 쳐다보면서 별 보고 누워 있을 때 산들바람이 지나가면서 아무튼 지금은 쉴 시간이잖아요. 그때 생각 그 기분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친구들도 있고요

서진규 씨에게 어린 시절 그렇게 구박하던 엄마를 용서했느냐고 물었다. 오늘 자신의 성공은 엄마라고 결론지었다.

서진규: 제가 박사 학위 받은 후 강연 (한국에서 1천 회 이상)을 많이 하면서 어린 시절 엄마한테 구박받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서울로 공부하러 갈 때 엄마가 먼저 허락을 했어요. 그러고 또 미국 갈 때도 엄마가 허락했고, 그래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어떻게 보면 우리 어머니는 저를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인물로 4년 동안 죽도록 훈련을 시키고 그다음에 진짜 길이 열릴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길을 열어 줬던 그런 결과를 가져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부모를 통해서 외유내강 (바깥으로는 부드러우면서 안으로는 차돌처럼 딴딴하고 힘찬)을 부모님을 통해서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리고 성공의 제일 큰 공신, 공헌을 세운 사람이 결국은 우리 엄마라는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서진규 씨는 어려움에 처한 세계 한인에게 자신이 설정한 희망의 꿈은 꼭 이뤄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도전하라고 충언한다.

서진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는 거지요. 사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많은 사람이 그 운명이라는 것, 주어진 환경 속에서 분노하고 좌절하고 쓰러져 버리거든요. 그러면 너무너무 억울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자기의 운명이라든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 제가 태어났을 때 우리 어머니는 가시나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살림하다 시집가면 장땡이다. 이렇게 생각하셨지마는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박사가 될 꿈을 꾸고, 공부를 잘하다 보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가게 되고 결국은 몇십 년 걸렸지만, 박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지금 이것은 나를 더 단련시키고 미래에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생각, 그 생각을 하고 내 운명의 주인은 나 그래서 결국은 내가 나를 도와서 내가 언젠가는 이 꿈을 이루고 말 거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어려움을 견디기도 쉽고 나중에는 진짜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희망을 품기를 바랍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가발공장 직공에서 하버드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의 억척 삶의 이야기 1부, 희망을 품으면 희망이 다가온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