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 ②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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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에서 미국 워싱턴주 상원 의원이 된 신호범 씨, 그는 ‘내가 한국인으로서 미국 워싱턴주 상원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유권자의 집을 방문하는 모습을 미국인들이 색다르게 본 것’이라며 ‘남들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을 아이디어’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한인들은 그를 한인으로서 ‘입지전적인 경력의 소유자’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 한인 2세들의 꿈과 소망이 이뤄지기 위해 긴 희망의 뿌리를 내리자고 세계의 한인들은 다짐하고 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에서 미국 워싱턴주 상원 의원과 상원 부의장으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펴는 신호범의 인생역정의 삶 2부를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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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 부의장. (사진제공-신호범 씨)
신호범 씨의 미국 정계 진출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신씨의 정계 진출의 발판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학창시절 정치가 뭔지 몰랐지만, 학교공부를 통해 정치인이 법을 만들고 법을 바꾼다고 해 정치진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정계의 연결고리는 1978년부터 1987년까지 3명의 주지사의 무역고문으로 있을 때이다. 1984년부터는 부스 가드너 전 주지사의 무역고문을 맡고 있던 시절 가드너 주지사가 87년 막상 정치를 권유했을 때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겁을 냈다고 한다. 그러다 5년을 미루다가 1991년에 도전하게 된다. 그의 정계 입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호범
: 제가 극동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여기 와서 일본말도 배우고 우리말과 또 중국말을 배워 무역사절단의 통역관으로 일본 중국 한국을 다녔습니다. 87년도에 중국서 돌아오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주지사가 ‘신 박사 우리 주를 위해서 많이 도와줬는데 이제 정치에 출마할 때가 됐소’ 하고 하원에 출마하랍니다. 이것이 내가 30년 이상 꿈꾸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주지사가 출마하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지요.

신호범 씨가 동양인으로 정계에 입문하려 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는 가드너 당시 주지사의 덕분에 용기를 얻게 됐다고 말한다.

신호범
: 그때 차별 때문에 무서워서 안된다고 그랬어요. 왜냐면 색깔 때문에 동양인이 어떻게 하느냐. 그런데 그분이 왜 나쁘냐, 당신 내가 도와주겠다고 나옵니다. 그것이 꿈꾸고 기도하던 답이 나왔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91년도에 처음으로 하원에 출마했습니다. 그때 보통 한인들이 정치에 출마한다면 교육위원부터 시작해서 시의원을 통해서 올라가는데 저는 주 하원부터 시작했어요. 왜냐면 주지사가 도와준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또 거기를 가야만 법을 만들고 법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그 말씀 덕분에 제가 용기를 얻어서 91년도에 하원에 출마했습니다.

신호범 씨는 정계 입문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당시 출마한 선거지역민의 97%가 백인 지역이다. 그는 ‘CAN DO’를 믿었다. ‘하면 된다’. 이런 힘이었을까? 그는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신호범
: 저희 선거지역이요. 백인들이 97%입니다. 타인종이 3%인데 대개 멕시칸들이 제일 많고 그런데 그런 지역에서도 이런 사람이 당선되었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근데 당선됐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CAN DO '하면 된다'

신호범 씨의 정계진출은 순조로운 듯했다. 그러나 1994년 연방하원선거와 1996년 워싱톤주 부지사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는 고뇌를 맞게 된다. 그리고 잠시 우즈베키스탄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신호범
: 제가 96년도에 부지사에 출마했었습니다. 부지사에 출마했었는데 열심히 했지만 온 주를 다 커버하기 때문에 제가 이기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교포들에게 미안하고 도와 주신 분에게 미안하고 나 자신도 미안하고 또 선거에 진 다음 학교로 간다는 것도 너무나 쓱쓰러워서 어디 가서 도망가서 1년 살아보고 오겠다 했거든요. 그러는 도중에 제가 자주 나가는 교회 목사님이 신 박사 이럴 적에 (저는 하와이나 희랍을 가고 싶었거든요) 1년 숨었다 오려는데 그런데 가면 더 외로워집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민족 역사를 한번 찾아서 이민 역사를 쓰는 게 어떻습니까? 이래서 먼저 우즈베키스탄을 갔어요.

신호범 씨는 우즈베키스탄 여행에서 과거 한민족의 불행했던 역사를 찾게 된다.

신호범: 한국 역사를 보면 우리 한민족이 고생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왜정 때 한일합방이 1910년부터 있었지마는 한인들이 많이 만주로 피난 갔습니다. 거기서 독립운동하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31년엔 만보산 사건 때 9,872명이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요. 그리고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31년도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러시아로 갔거든요. 거기서 독립운동했습니다. 37년도에 스탈린이 그걸 보고 겁을 내 가지고 왜냐면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사람 이용해서 침략하거든요. 그래서 한국사람들 다 모아가지고서 러시아에서 17만 명이 됩니다. 화물차에 실어서 멀리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에 던져버렸거든요. 그럴적에 4만 2천 982명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었어요. 참 가슴 아픕니다.

신호범 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조선아 할머니를 만나고 용기를 얻어 다시 정치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호범: 나의 이름은 조선아입니다. 우리 아빠가 왜정 때 일본 제국주의가 실어서 북간도로 이민 와서 독립운동하신분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자 우리 아버지는 러시아로 가서도 독립운동 하신 분입니다. 37년도에 스탈린이 우리 한국사람들 다 모아서 강제 이주 시킬 적에 우리 아버지도 기차에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화물차에 실어서 (짐승같이) 내가 그때 아버지 옆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스탈린 반대 운동을 할 적에 우리 아버지는 소련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이 화물차 문을 열더니 우리 아버지의 시체를 던져 버렸어요. 지금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걸 봤을 적에 워낙 가슴 아팠는데 왜 우리 아버지가 내 이름을 이렇게 지어 주신 줄 아십니까? 왜냐면 저를 볼 때마다 외딸인데 나를 볼 때마다 조선아 조선아 조선을 생각하라고 그런 말로서 이름을 지어 줬답니다. 제가 그 할머니 말을 듣고 얼마나 감동을 하였는지, 제가 정치에서 한번 졌다고 이까짓게 뭣인가 말이야. 내가 다시 미국 가서 정치하겠다 그래서 다음에는 정계 아니라 정글에라도 가겠다는 그런 결심을 하고 와서 상원에 출마했거든요. 조선아 할머니 덕분에 용기를 얻어서 또는 꿈을 가지고서 열심히 했기 때문에 상원에 들어갔습니다.

신호범 씨는 98년에 워싱턴주 상원에 도전하게 된다. 주위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말리는 주 상원의원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그의 상대 후보는 스노호미쉬 카운티에서 출마한 공화당소속 시장까지 지낸 우드 여사였다. 그는 10개월 동안 하루 10시간 이상씩 가가호호를 방문해 선거운동을 펼치게 된다. 당시 선거운동의 이야기다.

신호범: 어떻게 97%의 백인들 앞에서 선거운동을 하겠는가? 인종차별도 있곤 하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집집이 문을 두드려서 인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상원 당선되기 위해서 29,000집을 두드렸습니다. 2만 9천 집이라면은요. 상상도 못합니다. 하루에 보통 10시간에서 12시간씩 걸었거든요. 문을 두드리면서 ‘저는 한국서 이민 온 폴 신입니다. 이 나라 와서 많이 도움받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봉사하고 싶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이렇게 절을 하면서 선거운동을 했어요. 많은 미국사람들이 믿어줘서 또 아직 미국 정치인이 우리 집까지 걸어온 사람이 한 번도 없었는데 당신이 왔으니까 찍어 주겠다. 미국사람들이 언덕까지 걸어와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 여기까지 어려운데 왔다고 하면서 찍어 주겠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용기를 얻었어요. 미국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운동인데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가가호호 방문했던 결과로 상원선거에서 58대 42로 이겼습니다. 지금도 선거지에 가면은 요. 많은 사람이 당신 우리 집에 왔었다. 고맙다. 그렇게들 이야기합니다.

신호범 씨의 ‘가가호호 방문’ 선거 전략은 당시 언론에도 큰 화젯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회고이다.

신호범: 제가 가가호호 방문하고 있을 때 한 신문기자가 전화가 왔어요. 하는 말이 당신 많이 걷는다는데 정말입니까 물어요. 그래서 걷습니다. 지금까지 몇 집이나 문을 두드렸느냐고 그래요. 그때는 한 1만 5,000집을 두드렸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깜짝놀랐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 집을 두드립니까? 저는 두드립니다. 왜냐면 (하루에 보통 11시간 12시간을 걷기 때문에 )그래야 제가 당선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두드립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도 한번 같이 두드릴 수 있느냐고 그래요. 그래 오라고 했더니 그 다음날 사진사를 데리고 왔어요. 저와 같이 2시간밖에 못 걸었습니다. 그래 하는 말이 나는 2시간도 못 걷는데 당신은 어떻게 12시간을 걷느냐고 그래요. 그래 걷습니다. 그랬어요. 자꾸 어떻게 걷느냐고 물어요. 그래 농담삼아 제가 발을 붙잡으면서 이 발이 메이드 인 코리아 인 데 고장이 안 난다고 했거든요. 이 친구가 껄껄 웃으면서 갑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면 (그분이 제가 보기에는 저의 기도의 답이었습니다.) 주일날 신문에 3분의 1페이지 (첫 면에)에 나왔어요. 뭐라고 썼느냐. 폴 신 한국서 이민 온 자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고 유권자를 집집마다 두드리고서 방문합니다. 아침 9시가 되면 그 부인보고 잘 같다 오겠다고 인사하고 나갈 적에 그러면서 밤늦게 들어가면 부인이 소금물을 갖고 기다린 데요. 발가락에서 피가 나기 때문에 이 신문에 기자가 어떻게 썼느냐 면은 이런 정치인이 미국에 어디 있겠느냐 말이야. 우리가 이런 걸 배워야 한다면서 이런 정신이 미국의 장래 지도자로 필요하다. 아주 좋은 기사를 써 줬어요. 신문 기사 덕분에 제가 당선됐습니다.

신호범 씨의 자전 에세이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에서 신씨의 어린 시절 공부의 열정을 찾게 된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신호범: 그게 9살되던 때의 이야기인데요. 제가 학교를 못 가니까 학교 가면 얻어맞고 쫓겨나니까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은 학생들이 수업이 있을 때면 학교에까지 갑니다. 가서 안에는 못 들어가지만, 교실 유리창 있잖습니까 거리를 보면서 선생님이 쓰시는 걸 제가 쓰기 시작했거든요. 그랬는데 한번은 정신없이 쓰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질러요. 보니까 경찰 아저씨야. 어떻게 경찰이 무섭던지 도망갔거든요. 경찰이 너 이놈 서라고 뭐 훔쳤느냐고 해요. 저를 붙잡더니 때리지 않습니까 뭐 훔쳤느냐고 저 훔친 거 없습니다 해도 막 때립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아서 봤댔자 종이 한 장에 연필 한 자루밖에 없었거든요. 그걸 보시더니 흑판에 있는 것과 똑같으니까요 제가 거기서 보고 밖에서 공부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셨는지 날보고 하시는 말씀이 너 배고파 물어요. 그래서 배고파요. 그러니까 조그만 식당에 데려다가 따근한 국수 한 그릇 사 주고 나가셨어요. 저 그때 생각이 친절하신 경찰아저씨 내일 다시 와서 다시 얻어맞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유리창 밖에서 글을 쓰고 공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 도둑놈이라고 쓴 겁니다.

신호범 씨가 외로웠던 타향살이 ‘별을 세다 별이 되어’자작시를 함께 들어보자. 신호범: 고향산천 접어놓고 자유 찾아 기회 찾아 산 넘고 바다 건너 이역만리 이방 땅에 뿌리 내리려 귀먹어리 3년에 벙어리 또 3년 눈치 보며 다시 10년 순간순간 고비마다 님 계신 동쪽 하늘 향해 흘린 눈물도 시내가 되었다네 고목이 된 무릎을 일으켜 희미한 눈 들어보니 얼고 어느새 저토록 자랐을까? 들판 가득한 어린나무들 이제 쓰러질 날 멀지 않았는데 그 손에 쥐어질 것이 무엇인가. 씨뿌리는 농부처럼 저들 가슴에 꿈을 심으리라. 꽃피고 열매 맺어 이땅을 정복하라고------

신호범 씨는 미국인 아내 다나와 1965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부인자랑하면 바보라고 한다면서도 부인으로 인해 아버지와 새어머니 동생 다섯을 만나게 되고 또 모두 미국에 데려와 함께 살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신호범: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모국이 그리울 적에 아버지를 생각했거든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 그런 한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당신 그렇다면 아버지를 찾아보면 어떻냐고해요. 그래서 한국 나가서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군청에 연락해 보니까 직원 한 분이 아버지 어디 계시는지 알려 주십니다. 영등포 계셨습니다. 그래 가서 아버지를 찾았어요. 뵙고 보니 아버지는 재혼하셔서 이복동생들 5명을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배반당해서 그렇게 슬프게 자란 사람이 지금 재혼해서 이복동생 5명이나 낳았기 때문에 더 화가 낳거든요. 아버지는 더는 안보겠다고 돌아왔거든요. 그런데 저희 집사람이 말이에요. 그 동생들은 무슨 잘못이 있느냐 그리고 아버지가 가난했기 때문에 학교를 못 갔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이 동생들 데려오면 당신도 마음이 편해질 것 아니냐 그래요. 우리가 학교 선생인데 무슨 돈이 있느냐. 그렇다면 나도 직장을 구해 돈 벌어서 도와줄 테니까 동생들 데려오자고 그래요. 그런 덕분에 5명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미국서 공부시키고 다들 잘되고 있어요. 그러고 나니까 아버지가 그립지 않습니까 동생들이 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한국 가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저희 집에서 4년 7개월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말씀이 호범아 행복하게 간다.

신호범 씨는 아버지와 화해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호범: 왜 아버지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갔습니까 물었거든요. 아버지 말씀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기 핏줄을 버릴 수 있겠느냐. 너의 어머니 죽을 후에 너무나 가난하고 무식자 엮기 때문에 일도 못하고 갈대가 없어 다른 동내 머슴으로 팔려 갔답니다. 그리고 일본에 징병까지 가셨데요.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 말씀이 호범아 ‘나를 용서해라.’ 그러잖습니까. 그 말씀 한마디가 다 해결됐습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싫어했거든요. 그것은 제가 잘못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미워 했던 것이 제가 잘못으로 몇 시간 동안 같이 울면서 그러다가 아버지를 모시고 왔어요. 저희 집에서 4년 7개월 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인제 간다 참 행복해 우리 식구가 한꺼번에 만나서 사니까 아주 고맙고 참 감사하고 참 행복하게 간다. 이러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와서요. 옛날에 있던 한을 다 풀고 아버지 모시고 새어머니까지 모시고 저희 새어머니가 88세인데요. 지금 중풍에 걸려 말씀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십니다. 양로원에 계시는데 제가 시간 있는 데로 가서 점심 저녁 먹여 드리면 좋아하신 것을 볼 때에 왜 진작 일찍이 못 했던가 후회가 됩니다. 아버지도 행복하게 가셨습니다. 그런대서 고맙지요.

신호범 씨의 양 어머니 사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작년 9월 89세의 양 어머니 모시고 유럽 여행을 갔다 왔다고 한다.

신호범: 9월 18일부터 10월 6일까지 저희 양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지가 19년 됩니다. 저희 양어머니가 89세이시거든요. 제가 지난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 혹시 가시고 싶은데 보시고 싶은데 잡수시고 싶은 것 있으십니까 (어머니도 얼마 남지않고 저도 늙어 갑니다. 제가 74살이거든요.)여쭸더니 너 왜 묻느냐 그래 '농담삼아서 물었다고 하니까' 있데요. 그런데 지금은 불가능하데 뭡니까 했더니 평생 죽기 전에 터키를 보고 싶었답니다. 거기 가고 싶은데 나이 때문에 건강상 가지 못하기 때문에 못 가고 죽을 것이다 그래요. 그러냐고 집 사람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면 우리 어머니 모시고 갑시다. 그래요. 그래 어머니를 모시고서 스페인부터 시작해서 이탈리아 희랍 터키 이스탄불 등을 배를 타고 다니면서 3주일 동안 구경시켜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산을 올라갈 때는 업고도 가곤 했거든요. 그래 아들 노릇을 잘했거든요. 양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는 말이 참 아들 하나 잘 둬서 덕을 본다 하시면서 우시지 않습니까. 그런 어머니인데 지금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지만 가시기 전에 감사 드리려고 여행 시켜 드렸는데 너무나 좋아하셔서 참 좋았습니다.

신호범 씨는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한국에서 아들과 딸을 입양해 잘 성장시켰다. 자신의 양아들이 그려준 그림은 바로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고 회고한다.

신호범: 저희 사무실에 언제나 볼 때마다 감명을 느끼는 건 우리 아들이 말이어요. 2004년도에 그림을 그려 저에게 줬어요. 아들이 화가는 아니데 조금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에 어린이가 밥 한그릇을 들고서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있어요. 웃으면서 그래 제가 저의 아들보고 이게 뭐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THAT’S YOU 저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니까는 어렸을 적에 제가 어디서 낳고 자란는지 모르니까 아빠 어디서 낳았어 어떻게 자라서 그럴 때마다 답을 해줬거든요. 서울역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그때 8살 9살 때인데 그걸 기억하고 잊지 않고서 36살 때 오일 페인팅으로 그렸는데 젊은 아이가 밥 한 그릇을 놓고 젓가락으로 먹으면서 웃는 걸 그렸어요. 이게 뭐냐고 하니까 이게 아빠래요.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어릴 적 배고풀 적에 남들이 밥을 안줄적에 누가 밥 한 그릇 주면 내가 먹을 때에 그때 행복하고 푸른 하늘을 보고 희망이 있다고 해서 웃는다고 했거든요. 미국사람들 그림을 보고 물어봐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감동을 하여요.

신호범 씨는 작년에 한미 정치교육장학재단을 만들어 2세 한인들의 정치인 육성에 힘쓸 것을 다짐한다.

신호범: 저는 정치를 해 보니까 야 이것이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면 정치를 해야만 우리 소수민족으로서 꿈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제가 했으니까. 다른 학생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정치장학회를 조직해 조금씩 도와주고 있었거든요. 지금도 개인적으로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이 미국의 50개 주가 있는데 한 주에 한 명씩만 나와도 50명이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또 저는 그때는 21세기 안에 한인 대통령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을 바꿨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30년 안에 한인 대통령이 나올 겁니다. 우리가 이런 페이스에서 노력하고 손잡고 장학재단하면서 도와주고 정치인을 만들면요. 여기서 왜 대통령이 못 나옵니까 흑인 대통령도 나왔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호범 씨는 남북통일에 대한 열정도 보여 준다. 3년 전에 독일대사와 만나 독일 통일에 600 빌리언 달러가 들어 통일을 이뤘고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에 감동했다고 전한다.

신호범: 어떻게 같은 민족인데 안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 눈물을 질질 흘렸습니다. 그래서 저도 원컨 데는 하루바삐 남북통일이 되어서 북한에 있는 동포들도 남한 동포들 서로 손을 잡고서 좀 더 훌륭한 나라가 되고 한국이 세계에서 떳떳한 나라가 되는 것을 믿고 있거든요. 그런 꿈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고아에서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과 상원 부의장으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펴는 신호범의 인생역정의 삶 2부였다. 세계의 한국인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