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북한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시인 장진성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1.03.28
jang_poem_book-305.jpg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의 경험과 느낌을 담은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평양음악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후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대남심리전 작가였던 장진성. 두번이나 접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나의 작가’라고 불릴만큼 인정받은 1급 작가. 하지만 그는 2004년 두만강을 건너 한국에 들어간 뒤 이제는 탈북시인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 굶주림과 사투한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그린 시집 ‘내딸을 100원에 팝니다’ 통치자의 부도덕한 여성편력으로 희생된 가수 윤혜영의 비극적 죽음을 고발한 서사시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 를 2008년과 2009년 잇따라 펴내 유명해진 그가 올 2월에는 그동안 침묵했던 자신의 탈북 동기와 과정을 밝힌 수기 ‘시를 품고 강을 넘다’를 출간했습니다. 한국 입국 후 2010년까지 몸 담았던 국가안보전략연구소를 떠난 뒤 지금은 강의와 저작활동에 힘을 쏟고 있는 장진성 씨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기자
: 이 수기의 핵심이랄 수 있겠는데요, 장진성 시인이 통전부에 근무하다 탈출하게된 동기를 적어 놓은 대목입니다. 통전부는 ‘ 평양속의 서울이 되라’는 김정일의 지침대로 통전부 신분증을 갖게되면 남조선의 신문 테레비 도서 등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직업적 특권을 누리는 날 체제가치관이 붕괴됐다”고 했는데30여년 간 그것도 김일성 체제에서 친김일성주의와 수령주의에 완전히 세놰됐을 분이 어떻게 남조선 서적을 봤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가치관이 붕괴될 수 있겠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장진성
: 남한같은 다양성과 정보가 열린 세상이라면 그런 자료를 봤을 때 한번쯤은 의심해 볼 만했겠지만 북한은 모든 게 차단된 국가이고 폐쇄사회라서 새로운 정보에 대한 감수력과 그 전달 속도는 저한테 뿐만아니라 모든 북한주민들에게 상당합니다. 그만큼 흡수력이 높다는 얘깁니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역사는 물론 세계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나라입니다. 북한주민들은 유치원 때는 김일성의 어린시절을 배우고, 인민학교 때는 김정일의 인민학교 생활을 공부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개인 역사를 세뇌 받으며 자랍니다. 이렇게 철저히 왜곡된 인식을 지닌 반면 새로운 외부 정보를 접하면 그동안 교육받고 세뇌됐던 모든 가치관이 붕괴됩니다. 그래서 북한이 지금 남한과 대화를 하는 공석에서도 삐라를 들고나와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북한이 거짓의 나라이기 때문에 삐라 종이 한 장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에 핵이 있다면 남한에는 삐라가 있다고 늘 얘기합니다.

: 그러니까 현재 탈북자단체가 주도하는 민간단체들의 대북 삐라의 효과는 굉장히 크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네요.

장진성
: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예컨데 여러 색갈이 묻어있는 종이에 빨간 점이 떨어지면 그 많은 색갈의 한 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의 머리는 하얀 천과 같습니다. 철저히 김정일 신격화로 정제되고 여과된 하얀 천인데 여기에 까만 점 하나 떨어지면 그 점 하나로도 흰 종이가 얼룩이 되고 맙니다.

: 그만큼 외부 소식, 뉴스는 북한 사람들의 기존 가치관을 크게 흐려 놓을 수 있다는 말이네요.

장진성
: 그렇습니다.

: 그런데 한국의 월간조선이나 신동아등 남한 도서들의 ‘새달호가 나올 때마다 뜻이 검증된 친구들에게 돌렸다’고 했는데 ‘검증된 친구’란 무슨 뜻입니까?

장진성: 북한에서 반김정일체제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 깨어 있는 분들이 오히려 세끼 걱정을 해야하는 일반주민들보다 김정일에 대한 반감이 더 많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들은 북한 체제가 잘못됐음을 의식하고 있을 뿐아니라 그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혁명이 귀족들에 의해 먼저 시작됐듯이 북한도 깨어있는 많은 권력층 사람들에 의해 어느 한 순간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럼 통전부에 있던 동료 상관 부하 중에 김정일 체제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뭔가 잘못됐다,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적대감 내지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몇 퍼센트가 된다고 추정합니까?

장진성
: 제가 장담하는데 통전부 직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체제에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표현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 수기에 친구 황영민씨와 두만강에 도착해서 망연자실했다며 그 이유가 산은 높은데 몸을 숨길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장진성
: 우린 평양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지방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산에 나무가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국경근처에 가서 일단 산속에 숨어있다가 경비대원이 자리를 뜨면 강을 넘자는 단순한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정작 도착해 보니 정말 민둥산이었습니다. 작은 풀잎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민둥산이었습니다. 그때 저와 친구는 이것은 단순히 산이 헐벗은 것이 아니라 온 나라가 헐벗은 것이고 이 가난은 북한 전체의 가난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 거기서 북한경비대원에 발각돼 국경경비총국 6중대 병실에 끌려 들어간 뒤 그곳 중대장이 정성산 씨가 둘러댄 통전부 시찰이 진짜인지 확인하려 무산 시당에 전화를 하도록 했는데 정전이어서 전화 연결이 안됐다고 수기에 적었습니다. 어떻게 국경경비대같이 모든 게 잘 갖춰져 있어야 할 군부대에서 전화가 안 걸립니까?

장진성
: 아무리 국경이 중요하다해도 북한은 김부자 신격화 국가이기 때문에 혁명의 수도라고 하는 평양이 우선이고 국경은 그 다음 순위입니다. 하지만 평양시 조차도 제가 탈북 전에는 하루 전기 공급량이 4시간 뿐이었습니다. 말이 국경지역이지 산골이나 시골에 불과했고 전기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 그 다음에는 친구와 함께 두만강 얼음 위로 필사적으로 도주해 중국쪽으로 뛰어서 넘어가는데 북한의 경비대가 총을 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쏘지 않았던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다죠?

장진성: 제 책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총구를 보고 돌아서자니 뒤통수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건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에는 실제 뒤통수가 뜨거워질 정도로 공포를 느꼈습니다. 총알이 박힐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저는 넘고나서 왜 북한경비대가 총을 쏘지 않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조선족 주민 창용아저씨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물은 것이 왜 경비대원들이 총을 쏘지 않았을까였습니다. 그분 말씀이 그건 국제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한 게 “김정일은 국제법 기준을 초월할 정도로 공포정치를 하고 있지만 북한주민들은 세뇌돼 있어 용단을 못 내리고 있는 것이구나. 용단만 내리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심지어 김정일 정권도 북한주민들의 손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 방송이 북한주민들에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이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건 북한쪽에서 총을 쏘면 결국 중국쪽으로 가게되니까 그렇다는 거죠?

장진성: 그렇습니다.

: 연길 인근, 방금 말한 창용아저씨한테 처음 은신처를 찾기 위해 갔을 때 미국돈 7백달러를 건네줬다고 썼습니다. 모든 탈북자들이 미국돈을 소지하고 탈북하진 않을텐데, 장 시인은 미국돈을 얼마나 소지했습니까?

장진성: 떠날 때 몇 천불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중 7백달러를 창용아저씨에게 줬습니다. 그걸 준 이유는 가장 위험한 지역을 우선 벗어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탈북과정을 듣는 남한 사람들 중에는 이 ‘7백달러를 줬다’는 부분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배고파서 탈출한 게 아니라 북 체제를 혐오해 계획적으로 탈출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 북한 통일전선사업부에 있을 때 달러 소지나 바꾸기가 쉬웠습니까?

장진성: 북한 주민은 달러를 선호합니다. 북한국가의 화폐는 원화가 아닙니다. 국가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모든 시장가격이나 가치를 정하는 데 있어 달러가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북한화폐보다는 달러를 얼마나 갖고있느냐가 개인의 부의 척도입니다. 통전부 직원뿐아니라 북한의 시장세력은 달러를 선호하고 있고 달러를 어느정도는 소유하고 있습니다.

: 북한은 몇 년전 공식적으로 유로화를 채택했다 들었습니다.

장진성: 북한에서 어느나라 화폐가 더 유통이 쉬운가하는 관건은 중국에서 달러와 유로 중에 어떤 것을 더 선호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국은 유로보다 달러를 더 선호합니다. 그에따라 북한에서도 유로보다는 달러를 더 선호합니다.

: 창용아저씨의 안내로 장진성씨와 친구가 버스를 타고 연길로 가는 길에 곳곳에서 중국 공안이 검색을 했다는데, 공안은 버스에 올라 육안으로만 둘러보고는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탈북자를 식별하는 방법 덕분에 두 분은 얼굴색과 피부색이 좋아 안 걸렸다는 얘긴데, 중국 공안들이 실제 얼굴 모양색만 봐서도 탈북자를 분별할 수 있습니까?

장진성: 북한을 탈출하는 많은 탈북자들이 대부분 국경 연선에 사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생활고에 많이 지쳐있고 아무런 연고없이 중국에 넘어들어가 대부분 방황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는 7백불을 줘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지만 북한 일반 주민들은 버스에 타고 싶어도 돈이 없어 한 동안 방황하기도 하고 중국 조선족 집같은데 머물며 얻어먹고 농사일로 돈을 벌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공안들이 탈북자를 색출하는데는 겉모양만 보고도 가능하다는 것이 창용아저씨의 설명이었습니다.

: 공안에 쫓길 때의 심정을 쓴 대목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붙잡히면 자살하겠다는 분명한 각오라도 있지만 그에게는, 즉 조선족 안내자는 불안과 후회의 고통밖에 없어 보였다.’ 장진성 씨 친구는 중국에서 자살용도로 나중에 칼 까지 샀다고 적으셨던데, 실제 탈북할 때 자살할 각오를 했습니까?

장진성: 제가 책에서도 썼다시피, 탈북의 또 다른 말은 자기 ‘목숨’의 탈출이거든요. 단순히 북한 체제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탈북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의 3대멸족제도란 연좌제의 공포가 북한주민에게 세뇌됐기때문에 우리는 잡히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럼 대부분의 다른 탈북자들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각오할 생각은 있겠네요.

장진성: 거기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북한주민들의 경우 탈북하다 잡혀도 노동교화소나 일정한 처벌만 받고 다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3대멸족 연좌제로 모든 탈북자들을 처벌한다면 북한주민 2천만명이 아마 남지 않게 될 겁니다. 그때는 정말 김정일 혼자 남게 되겠죠. 그 때문에 탈북자의 직위에 따라 처벌에 경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와 친구같은 경우는 북한에서 중앙기관에 근무했기 때문에 다른 직종의 탈북주민과는 달리 엄격한 잣대가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자살하겠다는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다시 친구 영민씨의 얘기로 들어가는데요 수기에는 그분 할아버지가 중국뿐아니라 북한 교과서에도 나와있는 그런 출중한 인물이었다고 하던데요, 영민 씨 할아버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장진성: 북한은 1920년, 30년대에 죽은 민족사에 남을 만한 항일투사들까지도 김일성주의자로 만듭니다. 이들이 항일하다 숨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에게 충성하다가 죽은 것처럼 왜곡합니다. 이런 투사들 까지도 김일성 신격화 차원에서 악용하는 겁니다. 저의 친구 영민이의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분이 죽을 때 항일만세가 아니라 김일성만세를 부르며 죽었다고 왜곡선전했습니다. 이분을 김일성의 충신으로 정형화해서 주민들이 그의 충성심을 본받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 조선족 노인에게 탈출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김일성 죽기 전에 아들 김정일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권력갈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는데, 정말 김일성과 김정일이 그렇게 크게 대립했던 갈등이 있었습니까?

장진성: 한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1987년 경 소련 국방부장관이 이끄는 군사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때는 김일성이 주석궁에 거의 갇혀 살던 말년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권력은 두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김일성주석의 체계라는 상징적인 권력과 김정일 당 조직비서의 유일지도체제라는 실질적인 권력이있습니다. 김정일은 이 제의서 비준제도를 이용해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문건을 사실상 모두 원천적으로 차단시켰습니다. 소련군사대표단이 왔을 때 김일성은 대표단의 대우가 궁금했습니다. 대표단이 어디서 머물고 무엇을 먹는지 등은 주석으로서 고민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일성의 군사고문은 김두남이라는 4성장군이었습니다. 지금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의 동생입니다. 김일성은 김두남을 통해 무력부 대외사업국에 소련군사대표단이 제대로 우대를 받고 있는지 문의를 했었습니다. 문의를 해 본 결과 미흡하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대표단 숙소를 다른 데로 옮겨주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정일은 그 지시에 따르겠다고 한 뒤 바로 다음 날 무력부 대외사업국장을 해임했습니다. 사업국장이 김두남을 통해 아버지 김일성에게 그런 사실을 직접 보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두남 군사고문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냈습니다. 이 정도로 김정일이 전횡을 부렸기 때문에 김일성도 말년을 비참하게 보냈습니다. 김일성은 왜 자신이 주석궁에 갇혀 살아야 하고 자기 주변 인물들이 김정일에게 당해야 하는지 고심했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정일이 당조직 권력을 가지고 모든 부서의 장관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웠으니 말입니다. 김일성이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김일성은 94년까지 주석궁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다 사망한 것입니다.

: 김일성은 30여년 간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해 왔고 김정일도 자신이 실권을 쥐고 있는데 굳이 아버지 김일성을 고립시킬 이유가 있었습니까?

장진성: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눠가지지 못한다고 하지않습니까? 북한의 당 간부라면 김정일의 당 인사원칙, 북한 표현으로 ‘간부원칙’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한가지 사례를 덧 붙이면, 김정일은 항일투사출신들과 그 자녀들은 중앙당에 절대로 간부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항일투사들은 김일성의 연고자들이고 김일성의 측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중앙당이라는 핵심부서에서 일을 할 수 없었고 무역성이나 외무성 같은 변두리 외곽 기관에서 일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김정일이 자기 측근 연고자들로 간부진용을 갖추고 김일성과는 거리를 둿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김정일에 대한 외부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예가 책에 나옵니다. 용정리 노인과의 대화에 나오는 데요, 직접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노인은 오랜 중국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김정일을 격앙된 어조로 비판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민 전체를 굶길 수 있냐며 배를 보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식탁을 두드려댔다. 도피 과정에 조선족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일 고마웠던 말은 김정일에 대한 욕이었다.”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들이 실제 김정일에 대해 이러한 악감정을 갖고 있습니까?

장진성: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을 세계혁명의 수령이라고 선전합니다. 그리고 실제 그런 왜곡된 기사들로 노동신문과 공개 언론매체에서 선전을 합니다. 북한의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 김정일이 세계 인민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중국에 가서 조선족들을 만나보니 100이면 100, 1000이면 1000모든 사람이 그런 걸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제 자리 옆에서 밥 먹는 조선족들도 김정일을 욕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동경심을 갖고 있지만 김정일은 북한을 저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요 민족의 수치로 인식하고 있었고 북한식 표현으로 개욕 하듯 얘기했습니다.

: 용정리노인에게 김정일이 북한을 절대 개방할 수 없는 근거를 사례수준이 아니라 체제의 속성과 연결시켜 장시간 설명했다고 했는데요, 김정일은 절대로 개혁 개방을 할 수 없는 겁니까?

장진성
: 그 이유는 김정일은 자기 신격화를 위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왜곡해 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4살 어린나이에 조국광복을 위해 천리길을 걸어가 두만강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광복의 천리길’이라고 명명한 것인데요, 김일성의 신격화를 위한 천리길 노정을 반드시 다녀와야 대학생들은 졸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광복의 천리길’ 내막도 들여다보면 실제로 김일성이 조국 광보을 위한 행보가 아니라 동네 아이를 죽도록 패서 다리를 부러뜨려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일본 순경이 김일성을 잡으려 하니까 중국으로 피신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북한 주민들에 알려지는 순간 신격화는 무너지게 됩니다. 북한체제를 버티고 있는 것은 신격화란 기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악한 체제에서도 그런대로 북한이 굴러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신격화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개방으로 신격화를 허무는 정보가 북한 주민에게 알려질 경우 김정일 정권은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개혁개방 순간에 북한의 수많은 간부와 주민들이 탈북할 것입니다. 체제이탈을 막기위해서라도 북한정권은 절대 개혁개방을 할 수 없습니다.

: 장진성 씨가 남한에 들어가 가장 유명하게 된 것이 “내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시집입니다. 그 시집 얘기가 이 수기에 나옵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란 시는 1999년 평양시 동대원구역 시장에서 장진성 씨가 비극의 장면을 목격하고 쓴 시라고 적고 있는데요, 이 시를 읽노라면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량의 아사 사태를 연상케 합니다. 이 시에 나오는 여성의 경우가 한 두 건이 아닐 것이란 생각인데요.

장진성: 그 시집 속에 이런 시도 있습니다. ‘인당수’란 시인데요. 전설의 인당수는 눈 먼 아버지를 위해 쌀 3백석에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효녀 심청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북한주민들에게는 쌀 3백석에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인당수가 바로 북한의 현실입니다. 전설의 인당수가 아니라 꿈 속의 인당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을 백원에 팔아 백원짜리 빵을 사서 아이에게 줄 수밖에 없었던 그 어머니의 마음은 시에 나오는 그 여인뿐 아니라 북한의 모든 어머니들의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 처참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지식인이라면 그런 대량 아사현장을 반드시 기록해야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시를 썼다.” 고 했는데요, 그 사건이 시를 쓰게할 만큼의 동기가 됐다는 말입니까?

장진성
: 북한정치범수용소에는 많은 작가들이 끌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도 저와 같은 심정으로 북한의 수령문학에 반대하면서 인민문학을 남몰래 추구하다 발각 돼 수용소로 간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저뿐만아니라 모든 북한작가들의 고민이요 울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책의 또 한 곳에서는 ‘사형수’라는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면, “사람들이 모인 곳엔 반드시 총소리가 있다 . 오늘도 대중앞에서 누군가 또 공개처형을 당한다…‘쌀 한 가마니 훔친 죄로 총탄 90발 맞고 죽은 죄인 그사람의 직업은 농사꾼.” 북한실정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쌀 한 가마니 훔친죄로 만일 총살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90발까지 총을 쏘겠는가? 사형집행자들이 그 아까운 총탄을 실제 90발까지 쏠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장진성
: 북한의 공개처형은 형벌이 아니라 교양 목적이요 일종의 선전선동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공개처형시 반드시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형수를 묶어놓는 말뚝을 마치 무대처럼 꾸며 공개처형을 합니다. 사형수가 당하는 고통과 그에게 가하는 처벌을 굉장히 자극적으로 보여줘야지만 북한 당국으로서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집행자 몇 명이 나와 30발씩 쏘게 됩니다.

: 아마 다음 문제는 장진성 시인뿐아니라 모든 탈북자들에게 가장 민감한 대목일것 같습니다. 수기 76페이지를 보면, “모든 탈북자들에게 과연 자신들의 탈북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배고파서 살자고 왔든, 핍박으로부터 도망쳐왔든, 그 정권이 싫어서 침 뱉으며 왔든, 그것이 어떻게 자기 친부모형제들과 처자, 고향을 버리고 온 인간의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것이 어떻게 목숨보다 귀하다는 자유의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탈북자들의 가장 깊은 고뇌를 표현하는 글 같습니다. 장진성 시인은 북한에 부모님이 계셨죠?

장진성: 네.

: 그분들의 현재 상황을 압니까?

장진성: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 어머니 아버지 두분 계셨고 누이가 있었다던데, 일남일녀였습니까?

장진성
: 네.

: 본인도 탈북하기 전에 가족들에 대한 위험과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고뇌를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장진성
: 정말 저뿐아니라 모든 탈북자들의 가슴속에 가장 아프게 박혀있는 비수, 떼어낼수 없는 비수가 바로 이별의 아픔입니다. 근데 책에서 썼다시피 그정권이 싫어서 왔든 그 어떤 이유로 왔든 내가 인간이라고 되돌아 봤을 때 그 앞에서만은 정말 무너질 수밖에 없읍니다. 이렇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그 김정일정권이, 이런 독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라는 혐오와 가증스러움을 견딜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 북한을 나올 때 부모님께는 이별의 아픔도 드릴 기회가 없었다고 굉장히 가슴 아파하는 글이 있던데요, 탈북한다고 말씀을 안드렸다는 얘기입니까?

장진성
: 네.

: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런 모든 어려움과 고뇌와 아픔에도 불구,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들어갔을 때” 이런 얘기를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소리쳐 말하고 싶다. 그대들에겐 공짜로 태어난 대한민국이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겐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생명은 있어도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삶은 없어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자유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그처럼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고 절절히 외치고 싶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는 제가 듣기에도 어떤 남한사람보다 대한민국에 대한 조국애가 절절히 넘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로 조국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즉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친척이 있는 그런 조국이 아니라 묻히고 싶은 곳이다? 어떻게 이런 단언을 하게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장진성: 수기가 나온 후 동아일보에서 이진녕논설위원이 글을 썼습니다. 그 칼럼의 제목이 ‘탈북자 장진성씨의 조국’이었습니다. 그분도 거기서 “대한민국에 장진성 씨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던 조국 제가 죽어서도 묻히고 싶었던 조국은 독재의 조국이 아니라 자유의 조국이었고, 수령의 주체가 아니라 주민이 주체인 그런 평등한 조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 이 수기 “시를 품고 강을 넘다” 머릿글에 ‘왕초린 그녀를 찾고 싶다’는 사연을 적었고 책 마지막에는 ‘이 책을 탈북자들을 도와 준 왕초린을 비롯한 재중동포들과 대한민국에 오지못한 나의 친구 황영민에게 바친다.”라고 썼습니다. 결국 책의 시작과 끝에 조선족 여성을 언급했습니다. 이분은 어떤 분이었고 왜 이분이 그토록 장진성 시인에게는 중요한 분이었습니까?

장진성: 저희들의 탈북은 그 자체로도 기적이었지만 중국공안이 추격하고 북한이 살인자로 몰아 수배하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순간 순간 하루 하루가 모두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런 재중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났던 그런 인연의 기적이었습니다. 정말 우리 탈북자 2만명은 모두가 재중동포들에게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일정권을 미워할 줄 아는 그런 재중동포들, 그리고 인간의 양심과 동정심으로 이렇게 우리들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탈북 자체를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탈북 후 과정에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기어이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재중 동포들이 이념을 떠나 인간적으로 도와준 덕분입니다.

또 그들의 그런 양심이 어디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건 바로 민족애와 함께 김정일이라는 부도덕하고 정의롭지못한 지도자에 대한 인간적인 반감이 탈북자들을 돕는 촉매역할을 하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수기에도 썼지만 김정일은 민족의 포위망에 들어있는 셈입니다. 북한 내에는 김정일을 민족과 주민에 대한 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이 있고, 이웃인 중국 땅에는 김정일을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는 우리 재중동포들이 있고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우리 국민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김정일은 독재를 하면서 그 과정에 자기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북한에서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의 1급 작가였던 장진성 시인으로부터 그의 탈북 동기와 과정에 얽힌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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