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는 맘 먹기 나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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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연주자 최순경 씨.
아코디언 연주자 최순경 씨.
사진제공: 최순경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열심히 하는 데 뜻대로 잘 이뤄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잘 아는데 같은 문제를 설명해도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때 보통은 답답하다고들 말합니다. 탈북민이 남한에 가면 여러면에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탈북하면 또는 신분과 자유가 보장 되는 남한에 가면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코디언 연주자로 남한에서 활동하는 최순경 씨의 정착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순경: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거워요. 그때만큼은 즐거운데…

음악과 아코디언 연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최 씨는 현재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남한에서의 생활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젠 옛말처럼 말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고 그런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한 겁니다.

최순경: 중장비 대여해 주는 회사였어요. 전화가 오면 저는 다 알아듣는데 상대방은 내가 말을 하면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면서 야, 너 어디서 왔냐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사장님한테 제가 할일이 아니라고 제가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서 못하겠다고 하고 나왔거든요.

기자: 본인이 알아듣고 답변을 해줬는데 왜 상대방이 못알아들은 거죠?

최순경: 글쎄 저도 모르겠어요. 전화를 받아서 사장님 있냐 해서 없다고 하니까 언제오냐 해서 모른다고 하니까? 자기가 어디서 굴착기를 사용했는데 사장님한테 연락을 해서 조치를 취해야하지 않는가 해서 저도 사장님이 지금 어디계신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단박에 너 어디서 왔냐고 그러더라고요.

기자: 사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최순경: 사장님이 오신 다음 그 전화 받은 내용을 말씀드렸거든요.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서 상황 파악을 하고는 웃으시면서 아무말도 안하시더라고요. 사장님도 친구 소개로 제가 와서 난처하잖아요. 관둬라 그런 말을 못하잖아요. 제가 보니까 아무리봐도 못하겠더라고요. 더 하는 것이 사장님한테 죄짓는 것같아서 안하겠습니다 하고 제가 나왔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면 고칠수나 있으련만 문제가 뭔지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상대방이 화를 내는지 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좋아질 것이라고들 했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상황을 모른척 하고 버티기엔 25살의 인생경험 부족한 북한출신 여성이란 점이 버겁기만 합니다.

최순경: 그리고 또 처음 나오자 마자 석달만에 톨게이트에서 3일을 일해봤는데 못하겠더라고요. 지금은 경차도 알고 장애인증도 알고 하지만 그때는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3일 만에 때려치웠어요.

두 번째 직장은 톨케이트 수금원.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는 직업입니다.

기자: 차종에 따라 요금이 틀려지는데 차종을 구별 못해서 얼마를 내라는 말을 못한 거군요.

최순경: 들어오면서 뜨기는 뜨는데 어떤 때는 잘 인식이 안돼서 안뜨는 때가 있데요. 그리고 하이패스를 사용하면 말해줘야 하는데 그것을 못해서 엄청 일하시는 분에게 욕먹고 그랬어요.

기자: 차종을 모르는 것보다는 북한과 돈의 단위가 달라서 거스름 돈을 주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최순경: 그러니까요. 차가 진입하면서 요금이 찍히는데 어떤 때는 안되고 바퀴가 많은 것은 돈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말해는 것이 힘들었죠. 저는 하지 않고 옆에서 보면서 언니가 설명을 하면 내가 알았다고 답을 했는데 언니가 저에게 물어봤어요. 저 차는 얼마를 받아야 하니 그래서 모른다고 하니까 너 금방 안다고 해놓고는 왜 또 모른다고 하니 그러면서 욕을 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못하겠다고 했어요.

일의 강도가 높아서 몸이 힘들어 흘린 눈물이 아닙니다. 옆에서 보면 쉬워 보이는 것이 직접 하려니까 맘처럼 잘 되지 않았고 뭐가 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기초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도 이해가 안됐던 겁니다. 그리고 다시 찾은 곳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단순 노동일입니다.

최순경: 생산직에서 일하는 것이 편했어요. 그것은 기술이 필요없고 앉아서 조립하면 되는 것이었어요. 아침 9시에 나가서 저녁 6시에 들어오는 것이라 108만원 받고 일했어요. 점심도 안 주는 회사였는데 그래도 저는 탈북민라고 점심을 줬어요. 그 회사에서 5개월 일했는데 중국에서 생산해서 한국으로 보면서 포장해서 파는 회사였어요. 그 회사에 조선족이 있었는데 그 조선족보다 내가 중국어를 조금 더 잘해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고 또 머릴 쓰는 일도 아니고 매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조립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버틸만 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생활도 이 회사에서는 힘을 발휘합니다.

최순경: 생산 라인이 4개 있었는데 1반부터 4반까지 있었죠. 자기들은 중국어를 못하니까 나보고 돌아 다니면서 관리를 하라고 했어요. 자기들은 중국어를 못하니까 발주하는 것도 그렇고 중국 쪽에서 주문 오는 것도 잘 이해를 못하겠고 하니까 나한테 생산직에 조금 있다가  관리직으로 가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잠시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최 씨가 탈북한 것은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 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2007년 탈북을 했고 중국에서 몇 년을 살다가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방송: 3년 만에 만났을 때 눈물이 났어요. 그때 그순간이 꿈이었으면 했어요. 북한에서는 물한번 안묻히고 일하나도 안시켰는데 중국에 오니까 작업복 차림에 손에 낫을 들고 산에가서 일하고 오는 거예요. 그 순간 먼저 죽은 남편도 원망스럽고 내가 딸하나 있는 것 못 지켜줘서 이렇게 사는 구나 하고 정말 꿈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엄청 울었어요.

남한 텔레비전 방송인 “TV조선 모란봉 클럽”이란 프로그램에 최 씨의 어머니가 딸과 출연해서  중국에 살던 딸을 다시 만났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한 말입니다. 물론 현재 이들 모녀는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탈북민이 남한에 가면 정부에서 집도 주고 대학 학자금도 지원하고 정착금도 주지만 이런 정부지원은 탈북민의 빠른 사회정착을 돕는 것이지 부자나 영웅 대접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남한사회를 알기까지 초기정착 과정이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최 씨는 이제 자신이 뭘 하며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길을 찾은 겁니다.

최순경: 올해는 학원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가야 하고 공연이 있으면 공연하고 공연이 없으면 집에서 아코디언 연습하고요. 작년은 공연만 다녔던 것같아요. 한달이 30일인데 25일을 공연다녔더라고요.

왕성한 연주공연 활동을 하다보니 기동성이 있어야 했고 당연히 차가 필요하단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최순경: 운전면허 이번에 취득했습니다. 두 번 떨어지고 세번만에요. 넌 두만강도 넘어 탈북했는데 운전면허 하나 못 따냐 이랬어요. 제가 무서움이 많아요. 그래서 자전거도 못 타거든요. 그래서 운전면허를 취득 안하려고 했는데 제가 작년에 너무 힘들게 아코디언을 들고 다니고 해서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운전면허를 취득한다.

아코디언 무게가 13킬로그램 거기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상, 신발 하면 가벼운게 아니랍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연장을 찾아다니자면 힘들기 때문에 운전하는 것이 무서워도 직접 차를 몰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거죠.

이렇게 서서히 남한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생각도 변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자신의 내일을 꿈꾸고 있답니다.

최순경: 나도 이제 여행을 가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경제적으로 좀 나아져서 그런 마음이 생기나 봐요. 상해에 다녀왔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전철을 타고 가다가 엄마에게 그랬어요. 이번 여름에는 해외로 나가자고. 여유가 생기니까 어딘가 가보고 싶고 나도 남들 여행갈 때 나도 가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아코디언 연주자 최순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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