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새 출발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1-09-15
이메일
댓글
공유
인쇄
  • 인쇄
  • 공유
  • 댓글
  • 이메일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베트남에서 남한 행을 기다리던 탈북자 450여 명을 이틀에 걸쳐 전세기 두 대를 동원해 데려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남한에 입국한 탈북여성 이영미(가명) 씨는 이제 남한생활 8년 차가 됩니다. 오늘은 북한 감옥에서의 후유증으로 남한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 씨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40대 후반의 이영미 씨가 탈북 한 것은 2000년으로 이미 취약 계층에 속하는 어린이와 노인 등 자체 식량 구입이 어려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이영미: 제가 탈북한 것은 함경북도에서 살다가 배급도 안주고 먹고 살기 힘들어서 사사 여행사를 통해 중국으로 장사를 하려고 갔었죠. 그때는 도적도 많고 살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강냉이도 먹기 힘들고 해서 국경연선으로 나왔던 겁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아사자가 발생하면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신세가 됐고 그중에 또 많은 수의 주민이 찾은 곳이 중국입니다. 이렇게 탈북자가 늘자 중국 공안에서도 탈북자를 잡아들여 북한으로 강제북송 하는 수가 늘었습니다. 이렇게 매달 북한으로 보내지는 사람은 수 천 명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이영미 씨도 돈을 벌기 위해 건너갔다가 중국 공안에게 잡혔던 기억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두려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영미: (강제북송) 두 번 당했습니다. 중국에 도문 감옥이 있는데 북한에서 온 사람만 몽땅 잡아넣는 곳이었어요. 거기에 3천 명 정도 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회령 감옥으로 보내는 거죠. 두 평정도 되는 감옥에 사람을 서른 명 정도 넣었는데 잡혀온 이유도 배고파서 나오고, 엄마 찾아 나왔다, 딸 찾아 나왔다 이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감옥 생활이란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강냉이 알 몇 개 주는데 그것도 서로 도둑질해 먹으려고 하는데 노인들은 거기서 다 죽습니다.

강제 북송당해서는 중국에서 보다 훨씬 더 지독한 감옥 생활을 견뎌야했습니다. 그리고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온 이 씨는 또 다시 탈북 했고 제 3국을 거쳐 남한에 갑니다. 새로운 땅에서 일도 하고 돈을 벌어 새 출발을 해야 했지만 이영미 씨는 탈북과정에서 중국에서 헤어진 딸을 찾아 많은 시간을 남한생활 정착이 아닌 가족 찾기에 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한생활에 대해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자기가 사는 곳이 북한과 달리 마음껏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임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영미: 남한에서 그동안 생활을 보면 남한에서 사는 것은 자기가 열심히 살면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땅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말에는 당일치기로 어디든 비행기 타고 갈 수 있고 차타고 가자해도 어디든 갈 수 있고 기차도 많고 버스도 많고 교통이 너무 좋아서 가고 싶은 곳은 다 갈 수 있어 너무 좋은 겁니다.

한때 북한에서의 사업 수단을 살려 남한에서 결혼중매 회사를 차려 일해 보려고 준비하기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건강 때문에 힘든 일은 엄두조차 낼 수 없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이영미: 처음에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 울었습니다. 네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고요. 처음에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주위 사람의 도움을 기다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안 되겠다 싶어서 먼저 다가갔더니 손을 잡아주고 격려해줬습니다. 사람들에게 사심 없이 말을 하니까 진심이 통하더라고요. 제가 먼저 다가가야지 그 사람들이 제게 먼저 다가오지는 않아요.

어느새 남한생활이 8년이나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가버렸다고 말하는 이영미 씨. 남한에서의 생활 절반 이상은 중국을 오가면서 딸을 찾아 헤매야 했고 딸을 찾은 이후에는 몸이 아파 병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병원의 진단은 거의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이 씨는 좋은 일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영미: 저는 감옥에서 당했던 일로 몸이 너무 안 좋습니다. 머리를 맞아서 시력을 잃어가는 데요. 일을 못하니까 나라에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잠깐 어느 단체에서 사무직 일을 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월급을 받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보통 괴로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만병통치약처럼 해줄 수 있는 말이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 다란 말일 겁니다. 이 씨도 남한 생활이 더해가면서 사람들을 알게 되고 특히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남한정부가 탈북자의 의료지원을 하기 때문에 병원비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영미: 우리에게는 나라에서 혜택을 줍니다. 지정 병원에서 치료도 무료로 해주고 약도 줍니다. 복지가 잘 돼있어서 내가 얼마든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암에 걸려도 치료받잖아요.

가끔 이영미 씨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기구한가?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자신에게 반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보고 후회하거나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출신 성분과 토대를 문제 삼지 않고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이영미: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시력이 많이 안 좋다고 하니까 내가 볼 수 있는 날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세상을 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자식을 잘 키우고 싶고요. 또 북한에 있는 우리 부모 형제를 위해 봉사를 하고 그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치유해줄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겪은 아픔을 우리 후배들은 다시 겪지 않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는 지금 매일같이 시력을 잃어가면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저 세상 뒤편,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나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영미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싶은 말 (0)
  • 인쇄
  • 공유
  •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