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칼럼] 티미쉬아라에서 일어난 혁명
그렉 스칼라튜∙ 루마니아 출신 언론인
2009.12.15
2009.12.15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한 동유럽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20년전, 1989년 12월 17일 민족의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에 차우체스쿠 공산 독재체제가 무너졌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 독재자와 그의 아내는 군사 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20년전 루마니아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통해 루마니아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197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 독재 정부의 비효과적 경제 정책, 독재자의 개인 숭배, 언론 검열, 식량 부족과 인권 유린에 의해 루마니아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살았습니다. 1989년말 동유럽에서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헝가리, 불가리아와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동서독의 젊은이들은 베를린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루마니아의 혁명은 12월 17일 루마니아 서부에 있는 티미쉬아라라는 도시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티미쉬아라는 다른 루마니아 도시보다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티미쉬아라는 당시 루마니아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던 유고슬라비아의 국경에 가까웠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수입 소비재가 부족한 루마니아로 밀수품이 들어와 우선 티미쉬아라의 장마당에서 팔리곤 했습니다.
그 당시 인기좋은 수입 청바지, 신발, 온동화, 전자손목시계, 전자제품이나 록음악 음반과 테이프를 티미쉬아라의 장마당에서 구입해 다른 루마니아 도시의 암시장에서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언론 검열 때문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외국 TV방송을 볼 수 없었지만, 티미쉬아라 사람들은 서유럽과 더 가까웠기 때문에, 위성 안테나 없이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이나 조금 더 개방적인 공산국가 헝가리나 유고슬라비아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티미쉬아라 사람들은 서유럽, 특히 독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많은 티미쉬아라 사람들의 친척은 서유럽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인 서유럽에서 온 관광객과 티미쉬아라 사람들의 친척은 티미쉬아라를 많이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은 다른 도시보다 티미쉬아라에서부터 알려졌습니다.
1989년 12월 17일, 일요일, 오후 12시 30분쯤에 관중들은 티미쉬아라 중심가에 있는 오페라관 앞에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공산당 본부 건물로 들어가 문과 창문을 깨뜨리고 독재자의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들을 위층에서 길가로 던져 버리고 붉은 공산당 깃발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었습니다. 군인들, 내무부 군인들, 경찰, 비밀 경찰 요원들과 장갑차 몇 대가 공산당 본부 앞에 나타났습니다. 내무부 군인들과 비밀 경찰 요원들이 총을 쏴 먼저 민간인 두 명과 군인 네 명이 덤덤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다음 남자 한 명이 머리에 총알을 맞고 즉사했습니다. 내무부 군인들은 장갑차 위에 있는 연발총을 쐈습니다. 그러나 민간인들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무부 군인들과 비밀 경찰 요원들은 민간인들과 아파트 건물에 연발총을 쏴 버렸습니다. 12월 17일 오후 5시 15분 수십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시위하는 민간인들은 다리를 건너려고 하다 아이들까지 포함해 한꺼번에 몇 명이 총알에 맞아 강물에 빠졌습니다.
12월 18일, 새벽 2시 흰색 봉고차로부터 아파트 건물들뒤에 숨어 있는 민간인들을 연발총으로 쏩니다. 12월 18일 낮 민간인들은 그들의 대표진을 공산당 간부들에게 보내어 체포된 수백 명의 부상자와 수십 명 희생자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시외에서 탱크, 장갑차와 수천명의 군인들, 내무부 군인들과 비밀 경찰 요원들은 티미쉬아라의 민간인들을 공격하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12월 18일 공산당 간부와 비밀 경찰은 암호명 ‘장미꽃’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즉, 시체 공시소에서 희생자 시체 43구를 훔쳐 냉동차에 싣고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쉬티에서 태워 뼈와 재를 하수구에 버리며 모든 희생자들의 신분증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 비밀작전의 목적은 반공산주의 혁명의 규모와 희생자수를 왜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 당국은 시신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과 세계 언론에 그 43명의 희생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했다고 거짓말을 하려 했습니다.
다른 루마니아 도시에서 자유유럽방송과 같은 외국 방송을 통해 티미쉬아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루마니아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체스쿠는 티미쉬아라의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진압을 통해 루마니아 사람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공산당 간부들과 내무부 국방부 장군들에게 그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면 무조건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2월 17일 그는 이란으로 가, 이란의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차우체스쿠가 루마니아로 귀국한 후 혁명이 전국으로 퍼져 군대는 결국 국민들의 편에 서고 1989년 12월 25일 차우체스쿠의 악명높은 정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197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 독재 정부의 비효과적 경제 정책, 독재자의 개인 숭배, 언론 검열, 식량 부족과 인권 유린에 의해 루마니아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살았습니다. 1989년말 동유럽에서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헝가리, 불가리아와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동서독의 젊은이들은 베를린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루마니아의 혁명은 12월 17일 루마니아 서부에 있는 티미쉬아라라는 도시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티미쉬아라는 다른 루마니아 도시보다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티미쉬아라는 당시 루마니아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던 유고슬라비아의 국경에 가까웠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수입 소비재가 부족한 루마니아로 밀수품이 들어와 우선 티미쉬아라의 장마당에서 팔리곤 했습니다.
그 당시 인기좋은 수입 청바지, 신발, 온동화, 전자손목시계, 전자제품이나 록음악 음반과 테이프를 티미쉬아라의 장마당에서 구입해 다른 루마니아 도시의 암시장에서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언론 검열 때문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외국 TV방송을 볼 수 없었지만, 티미쉬아라 사람들은 서유럽과 더 가까웠기 때문에, 위성 안테나 없이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이나 조금 더 개방적인 공산국가 헝가리나 유고슬라비아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티미쉬아라 사람들은 서유럽, 특히 독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많은 티미쉬아라 사람들의 친척은 서유럽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인 서유럽에서 온 관광객과 티미쉬아라 사람들의 친척은 티미쉬아라를 많이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은 다른 도시보다 티미쉬아라에서부터 알려졌습니다.
1989년 12월 17일, 일요일, 오후 12시 30분쯤에 관중들은 티미쉬아라 중심가에 있는 오페라관 앞에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공산당 본부 건물로 들어가 문과 창문을 깨뜨리고 독재자의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들을 위층에서 길가로 던져 버리고 붉은 공산당 깃발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었습니다. 군인들, 내무부 군인들, 경찰, 비밀 경찰 요원들과 장갑차 몇 대가 공산당 본부 앞에 나타났습니다. 내무부 군인들과 비밀 경찰 요원들이 총을 쏴 먼저 민간인 두 명과 군인 네 명이 덤덤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다음 남자 한 명이 머리에 총알을 맞고 즉사했습니다. 내무부 군인들은 장갑차 위에 있는 연발총을 쐈습니다. 그러나 민간인들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무부 군인들과 비밀 경찰 요원들은 민간인들과 아파트 건물에 연발총을 쏴 버렸습니다. 12월 17일 오후 5시 15분 수십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시위하는 민간인들은 다리를 건너려고 하다 아이들까지 포함해 한꺼번에 몇 명이 총알에 맞아 강물에 빠졌습니다.
12월 18일, 새벽 2시 흰색 봉고차로부터 아파트 건물들뒤에 숨어 있는 민간인들을 연발총으로 쏩니다. 12월 18일 낮 민간인들은 그들의 대표진을 공산당 간부들에게 보내어 체포된 수백 명의 부상자와 수십 명 희생자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시외에서 탱크, 장갑차와 수천명의 군인들, 내무부 군인들과 비밀 경찰 요원들은 티미쉬아라의 민간인들을 공격하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12월 18일 공산당 간부와 비밀 경찰은 암호명 ‘장미꽃’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즉, 시체 공시소에서 희생자 시체 43구를 훔쳐 냉동차에 싣고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쉬티에서 태워 뼈와 재를 하수구에 버리며 모든 희생자들의 신분증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 비밀작전의 목적은 반공산주의 혁명의 규모와 희생자수를 왜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 당국은 시신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과 세계 언론에 그 43명의 희생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했다고 거짓말을 하려 했습니다.
다른 루마니아 도시에서 자유유럽방송과 같은 외국 방송을 통해 티미쉬아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루마니아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체스쿠는 티미쉬아라의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진압을 통해 루마니아 사람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공산당 간부들과 내무부 국방부 장군들에게 그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면 무조건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2월 17일 그는 이란으로 가, 이란의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차우체스쿠가 루마니아로 귀국한 후 혁명이 전국으로 퍼져 군대는 결국 국민들의 편에 서고 1989년 12월 25일 차우체스쿠의 악명높은 정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