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2001년 탈북, 중국에 살고 있는 탈북여성


2006.07.12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입니다. 2001년 탈북하여 2006년6월 현재까지 중국에 있는 북한 여성 김영복(가명) 씨가 남한의 국민들에게 보내는 편지 입니다.

"저는 북조선 양강도와 함경북도를 방황하며 살다가 2001년 북한을 탈북하여 현재 중국에 숨어 살고 있는 탈북여성입니다. 저는 양강도 보천군에서 한 보위부 운전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집은 그래도 전사자 가족이라고 나라에서 대우도 받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소나무” 텔레비전도 나라에서 선물로 주어 내가 어릴 적엔 우리 마을에서 우리 집에만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위부장 승용차를 운전하던 아버지가 보위부장이 직책에서 철직되면서 아버지도 그 직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친할머니가 사시는 길주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3대 독자로 태어나서 형제가 많은 집이 부럽다고 우리에게 4형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가정은 딸 둘, 아들 둘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저녁이면 온 가정이 모여 앉아 오락회도 하며 얼마나 화목하게 살았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과 함께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난으로 화목했던 우리 가정에도 검은 구름이 밀려 왔습니다. 먹을걸 겨우 이어대는 형편에 바로 아래 여동생이 심장병에 걸려 우리는 어려움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책가방 대신 장사 배낭을 메지 않으면 안 되었고 우리 집 텔레비전은 옥수수 한가마니와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동생의 병을 고치려고 집 재산을 다 팔아 약을 썼고 청진 병원에도 입원하였지만 동생은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동생이 죽으며 “엄마 나 죽기 싫어 나 살려줘요” 하던 말이 생각나 글 쓰는 이 순간도 저는 눈물이 가리워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동생이 우리 곁을 떠난 다음 우리 집 형편은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저와 저의 어머니는 중국 친척 도움을 혹시 받을 수 없을까 해서 온성군 남양리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중국 땅을 바라보며 친척이 나오기만을 기약없이 기다린다고 하여 “왜가리시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저와 저의 어머니는 왜가리로 석 달 동안 기다리다 못해 지칠 대로 지치고 가지고 있던 경비도 다 떨어져 옥수수 이삭을 주우러 낮 12시쯤 두만강변 옥수수밭으로 나갔습니다.

옥수수 이삭을 줍다가 나는 먼발치에서 경비대가 부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제는 안 되겠다고 중국으로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당원이고 또 교원생활을 하시던 분이고 세포부비서라는 것 때문에 중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당장 굶어 죽을 형편인데 동생들이 눈이 빠지게 우리를 기다릴텐데 먹을 것을 구하든지, 돈을 얻어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고 하면서 이 기회에 빨리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어머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삼촌이 도와 주겠다고 했다고... 한없이 순진한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전 그럼 내가 혼자 갈 테니 엄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우리 두 모녀는 논쟁 끝에 함께 강을 건널 결심을 하고 강에 들어섰습니다.

중간쯤 들어서니 물이 키를 넘었고 가던 도중에 어머니가 물살에 휘감겨 떠내려 가기도 했습니다. 불안과 고통을 이겨내며 ?아간 중국 조선족 친척집에서는 우릴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중국에 오니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국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앓는 동생에게 맛있는 걸 사 줄 수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려 동생 생일이 되면 맛있는 걸 사놓고 중국식으로 종이도 태우며 동생에게 언니가 맛있는 과자랑 사탕이랑 계란이랑 많이 샀으니 저 세상에 가서라도 많이 먹으라고 생일을 쇠 주었습니다.

북한친척들이 연속 ?아와 손을 내미니 그들도 짜증나기도 했겠죠. 그래서 저는 그 주변의 종이공장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중국인 집에서 가을걷이와 삯일을 했습니다. 우리모녀는 두 달 동안 받은 품값 3000 위안과 친척들도 조금씩 보태준 중국돈 3000 위안과 우리식구가 입을 수 있는 옷을 가지고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97년이 끝나가던 날입니다.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국경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 가다가 국경경비대에 잡혀 남양보안서에 호송되었습니다.

보안서에 끌려가니 보안원들이 우리 모녀를 다른 방에 갈라놓고 심문하였습니다. 당시 어머니하고 나는 이런 내용을 알았으므로 중국 친척집에 3일만 있다가 도움을 받고 넘어왔다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보안원들은 거짓말이라며 똑바로 말하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국에 가서 남조선사람 만난일을 솔직히 자백하면 용서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린 그런 사람 보지도 못했었습니다.

한 보안원이 저를 구둣발로 어깨와 잔등, 얼굴을 차면서 "간나새끼야, 네 에미가 사실대로 다 불었는데 너는 왜 사실대로 안 말하는가"라고 하면서 저의 턱을 구둣발로 올려 차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다음 그들은 어머니를 데려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하고 구둣발로 어머니의 허벅지를 마구 짓밟으며 중국에 가서 남조선 사람 만났던 것과 교회에 갔던 일을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친척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돈을 벌었고 2개월 있었다고 어머니가 실토했습니다. 그 후 우리모녀는 함경북도 온성군에 있는 남양노동단련대로 이송돼 갔습니다. 그날오후에 남양 교두를 통해 중국에서 조선으로 잡혀온 여성들도 남양 노동단련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이 되여 한사람 한사람 불러가더니 아니 글쎄 지금껏 살면서 상상도 못해본 일이 저에게 가해졌습니다.

제가 조사받으러 방안에 들어서자 보위지도원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옷을 다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멈칫거리는 저에게 보위지도원은 “뭘 꾸물거려? 이썅간나새끼, 중국놈들에게 몸을 팔 땐 안 그랬겠지?” 하면서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집어들며 저를 때리려 했습니다.

몇 대 맞으며 반 정신 나간 저는 와들와들 떨며 벗으라는 대로 다 벗고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여기서 반항이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옷가지의 갈피갈피를 샅샅이 뒤지고 좋은 옷은 자기들이 다 가지고 헌옷만 골라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앉았다 일어섰다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이 깊은곳에 감춘 돈을 뽑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 차례였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갔었고 어머니는 몇 명이 들어간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아들같은 조사관들 앞에서 벌거벗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 날 밤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맞은 어혈로 하여 저의 입은 원숭이 입처럼 흉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너무 통증이 나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소리가 나더니 보안원이 들어와 왜 앉자고 앉아 있는가 하며 규율을 어긴 죄로 전원을 다 기상시키고 밖에 나가 모이라고 하고 저를 대중 앞에 세우고 모두에게 저를 욕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퍼붓는 욕설에 저는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밥이라고 주는 것이 시래기 소금국에 삶은 옥수수 몇 알, 멀건 통강냉이 시래기죽이었습니다. 중국에선 입쌀밥이라도 묵은 것이면 개도 맛이 없어 안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가 그런 걸 먹으며 목숨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고달픈 단련대에서 하루하루는 정말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죄인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게 되었고 또 오랫동안 품어온 당과 수령님, 조국의 품이란 감정을 버리고 이 나라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를 나가면 꼭 다시 중국으로 가리라! 갔다가 다신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때 저의 결심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저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를 배신했기에 배신자란 말을 들어야 하고 우리에게 굶어죽으면서까지 버티고 지켜야 할 조국이 과연 있는가를 남한의 일부 사람들에게 절절히 묻고 싶은 심정을 안고 글을 마칩니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

(2006년 6월 5일 중국 흑룡강성에서 탈북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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