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고향에 계신는 외삼촌에게 보내는 편지


2006.07.05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살다가 1997년 1월에 탈북한 이정혁(가명)씨가 고향에 계시는 외삼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고마운 외삼촌께 드립니다.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외삼촌의 바래움을 받으며 음력설날에 새별군에서 두만강을 넘어간 조카입니다. 20살에 두만강 넘어왔는데 지금은 29살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가 죽고 나 혼자 영양실조로 죽을 고비에 처하자 외삼촌이 저를 중국으로 가서 빌어먹어서라도 살라고 보냈는데 지금은 남한에 와서 대학생이 됐습니다. 그동안 소식 못 전해서 죄송합니다. 늦게나마 외삼촌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그 후 소식을 간단히 전해 드립니다.

새별군 읍에서 외삼촌과 헤어지던 밤 저는 밤12시경에 외삼촌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음력설을 맞는 중국의 시골마을의 폭죽놀이를 난생 처음 황홀하게 보면서 훈춘의 외딴 농가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중국말과 조선말을 섞어하는 40대의 집주인 아줌마가 나왔습니다. 그는 초췌한 나를 보더니 별로 놀라지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방안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중국말로 아줌마에게 무어라고 말하자 흰쌀밥을 담은 커다란 그릇과 김치, 삶은 계란 한 바가지를 밥상에 차려 놓고 날보고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배고프고 그렇게도 상상해 보았던 쌀밥이 3킬로그램 정도 담아 있는걸 보고 체면이고 뭐고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먹어댔습니다.

방안에 있던 중국남자는 전화기를 들고 누구와 중국말로 통화하고 아줌마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나에게 조선말로 “조선에서 이렇게 모두 넘어오면 이제 몇 년 후엔 빈 땅이 많아질 것 같다고 하더군요. 매일 나 같은 사람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한 창 밥을 먹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고 군복 입은 남자 3명이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인남편의 전화통화는 변방부대에 신고하는 전화였다는 걸 저는 미처 몰랐었습니다.

변방군인들은 겁에 질린 저에게 “먹던 밥은 마저 먹으라. 우린 변방부대에서 왔다. 밥 먹고 우리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주인집 아줌마가 통역을 했습니다. 저의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군인한명이 ”너 몇 살인가?“고 묻기에 20살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똑바로 말하라. 왜 아이가 어른행세를 하려고 하는가?”고 합니다. 그들은 저를 “20살이 아니라 14살이나 15살 정도로 보이는데 격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자동차에 앉아 호송되면서 그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고 저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달리는 도중에 책임자로 보이는 군인이 차를 세우더니 저희들 끼리 중국말로 한참 이야기하더니 나의 수갑을 벗기면서 북한쪽을 가리키며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중국 군인들의 얼굴엔 “얼마나 굶주렸으면 20살 청년을 14살 아동으로 보일까!” 하는 동정의 빛이 역역했습니다.

한 군인이 도로 주변의 가게로 가서 빵10개를 사와서 저에게 주며 빨리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중국의 15살 아이들은 모두 북한의 20대 청년 군인들보다 더 신장이 크고 건강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들과 헤어져 두만강을 반쯤 건너는 것처럼 가다가 되돌아 중국 땅으로 다시 갔고 밤새 걸어서 화룡시로 들어갔어요. 그 후 연길, 장춘으로 헤메다가 3년 후에 여기 남한에 왔습니다.

난생 처음 비오면 우산을 쓰고 갈수 있게 되어 행복합니다. 저의 어머니와 누나는 우산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비오면 그대로 옷이 흠뻑 젖으며 비를 맞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너무도 못살던 지난날들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저는 고향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남한에 오니 사로청 조직생활이란 것이 없어서 좋습니다. 그렇게 들볶아 대던 조직생활총화도 없고 놀러 다녀도 통행증 같은 거 없어서 참 살기가 편합니다. 강제적인 통제가 전혀 없어서 이북에서 온 사람들 모두 자유세상에 온 보람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외삼촌도 오실 수 있으면 오십시요. 삼촌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자전거지만 그림의 떡인데 서울의 저희 집엔 자가용승용차가 있답니다. 지금의 저의 생활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외삼촌, 저는 지금 의학공부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이북에서 병약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통일되면 우리 고향사람들부터 치료해 주고 싶어요. 우리고향이 깊은 산골이라 아파서 병원에 가자해도 200리 산길을 소달구지를 타고 하루를 걸려도 못가는 곳이지만 통일되면 그곳에 자그마한 진료소를 차려놓고 제가 고향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날까지 고향사람들 모두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외삼촌이 몸성히 계시길 바라면서 2006년5월 28일 남한에서 조카 올립니다. " 그러자 군인들은 “똑바로 말하라. 왜 아이가 어른행세를 하려고 하는가?”고 합니다. 그들은 저를 “20살이 아니라 14살이나 15살 정도로 보이는데 격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자동차에 앉아 호송되면서 그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고 저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달리는 도중에 책임자로 보이는 군인이 차를 세우더니 저희들 끼리 중국말로 한참 이야기하더니 나의 수갑을 벗기면서 북한쪽을 가리키며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중국 군인들의 얼굴엔 “얼마나 굶주렸으면 20살 청년을 14살 아동으로 보일까!” 하는 동정의 빛이 역역했습니다. 한 군인이 도로 주변의 가게로 가서 빵10개를 사와서 저에게 주며 빨리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중국의 15살 아이들은 모두 북한의 20대 청년 군인들보다 더 신장이 크고 건강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들과 헤어져 두만강을 반쯤 건너는 것처럼 가다가 되돌아 중국 땅으로 다시 갔고 밤새 걸어서 화룡시로 들어갔어요. 그 후 연길, 장춘으로 헤메다가 3년 후에 여기 남한에 왔습니다.

난생 처음 비오면 우산을 쓰고 갈수 있게 되어 행복합니다. 저의 어머니와 누나는 우산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비오면 그대로 옷이 흠뻑 젖으며 비를 맞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너무도 못살던 지난날들을 생각해서라도 지금 저는 고향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남한에 오니 사로청 조직생활이란 것이 없어서 좋습니다. 그렇게 들볶아 대던 조직생활총화도 없고 놀러 다녀도 통행증 같은 거 없어서 참 살기가 편합니다. 강제적인 통제가 전혀 없어서 이북에서 온 사람들 모두 자유세상에 온 보람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외삼촌도 오실 수 있으면 오십시요. 삼촌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자전거지만 그림의 떡인데 서울의 저희 집엔 자가용승용차가 있답니다. 지금의 저의 생활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외삼촌, 저는 지금 의학공부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이북에서 병약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통일되면 우리 고향사람들부터 치료해 주고 싶어요. 우리고향이 깊은 산골이라 아파서 병원에 가자해도 200리 산길을 소달구지를 타고 하루를 걸려도 못가는 곳이지만 통일되면 그곳에 자그마한 진료소를 차려놓고 제가 고향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날까지 고향사람들 모두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외삼촌이 몸성히 계시길 바라면서 2006년5월 28일 남한에서 조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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