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북에 계신 어머님과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2006.05.03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입니다. 북한 평안북도에서 살다가 지난 1999년 여름에 탈북하여 2002년에 남한에 온 김영건씨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과 두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어머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머님께 무릎 끓고 빕니다. 1999년 여름에 집을 나서는 이 아들을 쳐다보며 아무 말씀도 없이 눈물만 흘리시던 어머님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비교적 근심 없이 살던 우리 집이 아버지가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가셨다가 잘못되신 후로 어려워진 집안살림을 혼자 돌보시며 세 아들을 키우시느라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온갖 고생 다하신 어머님께 여기 남한 땅에서 불효한 맏아들이 큰절 드립니다.

한창 먹어대던 나이 때인 세 아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시려고 어머님은 뒷마을 까막산을 손이 닳도록 허비여 먹을 수 있는 풀을 뜯어오시던 우리 어머님. 옥수수밥에 주어온 시래기와 풀을 섞어 그나마 배를 불리며 어머님의 고생에는 전혀 안중에 없었던 철없었던 그때가 죄스럽습니다. 영복이와 영삼이는 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영복이는 농장에서 일하겠군요?

영삼이는 군대나간다고 하던데 지금 어떻게 \x{b42c}는지요? 좀 고생스러워도 아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던 어머님의 생각이 옳았습니다. 까막산 중대 군대들이 1997년에 우리 집 재산의 전부인 돼지와 염소를 훔쳐갔을 때 어머님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됩니다. 그해 추석날 아버지산소에 가져갈 술 한 병 얻으려고 제가 아버지와 어머님이 결혼하실 때 구입하셨다던 옛날 벽시계를 시장에 팔았을 때 어머님은 저를 칭찬하셨죠. 그때 전 속으로 울었습니다. 어머님이 일평생 아무리 농장 일에 열성이어도 가을 분배 때엔 한 달 분의 식량 밖에 못 받곤 하던 우리 집에서 그래도 어머님은 풀죽이든, 옥수수죽이든 우리를 굶지 않게 하시려고 애를 쓰셨죠. 제가 중국에 있다는 친척을 찾아가 식량도움을 받아보겠다고 집을 나선지 7년이 지났습니다. 3개월 후엔 꼭 쌀 한 배낭을 지고 온다던 제가 어머님 앞에 한 약속을 어기고 여기 남한 땅에 와서 살게 된 데는 너무 많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중국의 여러 지역을 숨어 다니며 세상을 조금 알게 됐습니다. 찾고 싶었던 친척은 찾을 수가 없었고 여기저기 다니며 개인농가들의 일을 해주며 중국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됐습니다.

중국농민들은 조선에서처럼 협동농장에 속해서 집단적으로 일하지 않고 모두 자기 땅에서 자기수입을 위한 노동으로 농사를 합니다. 가을에 수확한 작물은 모두 농민자신의 것이어서 스스로 장에 팔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던 농장에 5대뿐인 뜨락또르도 중국농민들은 개인집에 뜨락또르, 농기계를 가지고 있으며 군농촌경영위원회에 한 대있는 2톤짜리 화물트럭도 중국농민들은 개인집에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농민들은 먹을 걱정이나 입을 걱정 같은건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나라가 개방 돼서 잘삽니다. 저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을거예요. 강연회 때 선전하는 망해버린 중국이란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적어도 조선의 시장엔 중국상품이 90%나 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어머님, 누가 뭐래도 자신만을 믿고 굳세게 사십시오. 이 아들도 남한 땅에서 마음껏 대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멋진 아들이 되어 어머님 앞에 갈 것입니다. 남한엔 동물들도 사람처럼 잘 가공되고 포장된 식품을 먹습니다. 여기선 굶어죽는 사람이 전혀 없답니다. 저도 먹고 싶은거 다 먹으며 장학금까지 받으며 서울의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걱정되는 건 굶어죽을지도 모를 조선에 있는 우리 어머님과 두 동생들입니다.대대로 땅만 뚜지는 농사군의 집안에서 제가 대학생이 됐습니다. 남한에선 자기의 능력만 되면 스스로 시험 치르고 합격하면 대학입학이 됩니다.

자본주의라서 불평등하고 서민은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무슨 빽이 있었겠어요? 자유민주국가가 진정으로 백성들이 살기에 좋은 사회란 걸 알게 됐습니다. 어머님, 좋은 세상은 꼭 온답니다. 통일되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 저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영복아, 영삼아! 부디 고생 많으신 우리 어머님 잘 모셔라. 형이 맏이구실을 못하고 멀리 와 있는 건 자식으로서 더 큰 구실을 하고 싶어서 여기 왔단다. 그렇게 이해하고 건강해서 다시 만나자.

어머님, 안녕히 계십시오. 2006년 4월 25일. 서울에서 맏아들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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