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북한의 형님께 보내는 편지


2006.07.26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탈북자의 편지’ 순서입니다. 북한에서 살다가 2003년8월에 남한에 온 박길준 (가명) 씨가 북한에 살고 있는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형님과 작별한지 4년이 되옵니다. 어머니와 조카, 형수님도 무고하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남한으로 온 것에 대하여 잘했고 못 했고를 떠나서 형님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곳에 형님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느라 고생 많겠습니다.

형님, 이 동생이 남한에 왔으니 그곳 식으로 표현하면 범죄자이고 그로인하여 고통 속에 살아갈 어머님과 형님을 생각하니 슬픕니다.

전 북한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배고픔과 경제적 빈곤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죠. 사람들을 오도 가도 못하게 이동을 통제하고 인간의 초보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하며 살기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직장에선 당조직이라는 것이 정신을 꽉 틀어잡고 직장밖에선 보안원들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늑대처럼 도사리고 집에 들어오면 담당보안원의 감시망 속에서 부부간에도 당과수령에 대한 효자다운 언행만을 강요하는 그런 사회가 싫었습니다.

형님, 지나간 이야기 하나 전해드립니다. 배급을 제대로 못 받던 1994년5월에 제가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을 모시고 평양창광거리 은덕불고기집에 간 적있습니다. 두 노인은 60대중반으로 전쟁노병이고 오랜 당원이고 한대 공장의 간부지에 있던 분들입니다. 정철아버지라고 생각나죠? 아버지도 그분도 당과수령밖에 모르고 살아오셨죠.

언젠가 두 분이 주고받는 말을 듣노라니 대화의 전부가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자식들 없는 때에 말로라도 먹는 상상을 할까? 하고 생각하니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음날 외화식당 표를 구해서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형님도 아실테지만 창광음식점엔 평양시민들도 일반 서민들은 구경도 못하는 곳이 아닙니까!

노인네들은 저의 손에 끌려 식탁에 앉았는데 마치 오지 못할 곳에 온 사람처럼 죄스러운 자세더군요. 괜히 주눅이 들어 앉아있는 아버지께 < 아버지, 여기서 소불고기와 평양냉면, 봉학맥주를 하는데 마음껏 드십시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 내 생전에 이런 식당에도 와 보는군...이런 곳엔 처음이다.>고 하시더군요.

막상 얼마 잡숫지도 못하시는 노인들이여서 갈 때 2인분씩 포장해서 나왔습니다. 잡수시면서도 뭔가 미안해하는 자세였습니다. 아마 혼자 고급스러운 곳에 와서 먹자니 미안한 사람도 있었겠죠.

그 후 3년 후 두 노인은 한 달 간격으로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노인들처럼 우리 아버지도 배고픔과 싸우다가 쓰러지신 것입니다. 숨을 거두시기 전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 난 우리나라에 그런 희한한 식당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둘째 덕분에 외국 사람들 드나드는 식당에서 먹어봤다>고 했답니다.

아버지 사망 직후 아버지가 정히 다루시던 궤짝을 정리하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1년 전에 전국노병대회참가자들에게 선물로 준 설탕3킬로그램과 흰쌀 2킬로그램, 찹쌀500그램, 식용유 한병, 현금 200원이 있었는데 포장겉면마다 < 노친생일에 쓸것>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제각기 바빠서 부모님이 그토록 굶주림을 이겨내시느라 고생하신 것을 미처 알려고 노력하지 못했죠. 어머니말씀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3개월 전부터 쌀이 없어서 옥수수죽에 능쟁이풀을 많아 섞어 잡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 식량사정이 어려운 집들에서 먹는다는 능쟁이 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먹으면 배는 부른데 칼로리는 없고 오래 먹으면 중독이 온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그때 평양시의 어려운 집들에서는 토끼풀을 뜯어간다고 하면서 집에 가져가서는 풀죽을 끓여먹으며 살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형님, 기억나십니까? 1993년 여름에 통일거리 광장 앞 민예전시관에 갔다가 통일1동 71반 21층에서 투신자살한 전쟁노병이 생각나죠? 길 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죠. 굶다 못해 화가 난 어젯날의 간부가 집에 갇혀 배고픔을 참다 못해 자살을 했던거죠. 그런 일이 여기 저기서 보이면서 전 나라꼴이 비참해 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적어도 자유가 그리웠습니다. 적어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수령님에 대한 충실성을 근거로 하는 전 사회적 일심단결 과 중앙집권제적 민주주의란 것이 한평생 등뼈가 휘도록 일하는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고생을 각오하고, 어머님과 형님께 미안함도 생기지만 여기 남한으로 왔습니다.

여기 남한에서는 당조직 생활도 없고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받는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면 그만이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돈을 벌어 풍요로운 삶을 꾸려가는 것이 저의 보람입니다.

훗날 통일되어 만날 때가 되면 제가 해야 할 몫이 크다고 보고 지금은 반역자라고 하든, 도주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에겐 오직, 현재의 저와 저의가족의 삶이 중하고 그리고 어머님과 형님이 무사히 계시기만을 바랍니다. 통일되는 날까지 건강하십시오.

2006년 6월19일. 남한에서 동생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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