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간도와 간도 5-30 폭동 편- 심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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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역사기록에 "간도는 우리땅"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 ; 오늘의 역사 > ; 이 시간에는 현재 중국 길림성 동쪽과 남쪽에 자리잡은 간도땅 문제와 1930년에 일어난 조선족 농민폭동사건편을 보내드립니다. 심재홉니다.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동간도로 나누어 부릅니다.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 상류인 중국쪽 백두산 일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동간도는 두만강 건너편인 훈춘, 연길, 왕청 그리고 화룡현 등 네개 현을 포함하는 일댑니다. 북간도는 동간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간도라면 동간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반도의 면적이 남북을 포함해서 약 22만평방킬로미터입니다. 그런데 간도의 땅넓이는 2만1천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 크기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현재 간도지역의 조선족인구는 80만명인데 이 지역에 사는 전체인구의 80%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발해국이 망한 뒤에 여진족이 주로 이지역에서 살았습니다. 간도지역은 옛날에는 중국과의 국경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1712년 조선조 숙종때에 백두산 분수령을 중심으로 정계비를 세웠습니다. 그후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의 이등박문이 1909년 청나라와 이른바 "청일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때 이등박문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이 간도지역을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한 뒤에 땅을 빼앗기고 온갖 수탈을 당하는 수많은 농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간도땅으로 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일단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민족은 당시 남의 나라땅인 중국에서 당하는 수모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인 지주의 수탈과 일본과 중국 관헌들의 폭압 그리고 무법천지로 휩쓸고 다니는 마적들의 약탈이 곳곳에서 이루어졌읍니다.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던 농민들이 견디다 못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중국인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내릴 것과 소작권을 영구히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관청을 습격했습니다. 그리고는 소작료를 내지 않고 진 빚을 갚지 않는 저항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1930년 5월에 발단되어 그 다음해까지 이어졌는데 봉기회수가 7백건에 이르렀읍니다. 이 사건으로 2천명의 조선농민이 일제에 의해서 체포되고 수많은 농민이 중국인들에게 학살당했읍니다. 이 사건을 역사는 < ; 간도 5-30폭동 > ; 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5-30간도폭동이 일어난 당시 간도의 인구는 60만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사람이 40만이 넘었습니다. 1896년 오늘인 4월 7일 서재필이 < ; 독립신문 > ; 을 창간했습니다. 1464년 오늘 서울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가 준공됐습니다. 4월 7일을 1948년 유엔보건기구에서 < ; 세계보건의 날 > ; 로 지정했읍니다. 지금까지 < ; 오늘의 역사 > ; 로 간도문제와 1930년 간도에서 조선농민이 일으킨 < ; 간도 5-30농민폭동 > ; 편이었습니다. RFA 심재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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