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전통순대집 운영, 탈북자 최순애 씨

200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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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최순애 씨는, 지난 5월 서울 도봉산 부군에 함경도 전통 순대집을 열었습니다. 온 가족과 함께,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어렵게 남한에 들어온 최 씨는 순대를 파는 장사를 하기 까지 병원일, 파출부, 식당, 외판원 등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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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최순애씨가 운영하는 함경도 전통순대 식당 - RFA/이진희

최순애 씨의 이야기를 1, 2부로 나눠 방송해 드립니다. 이 시간에는 최순애 씨가 남한에 들어오기 까지 험난했던 탈출기를 들려드립니다. 진행에 이진희 기자입니다.

중국과 남한을 드나들며 사업을 하고 있는 최순애 씨의 남편은 북한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최순애 씨 또한 북한에서 병원 약제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북한을 나오게 됐습니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있으면서, 남한 행을 계획했지만, 21명의 가족을 다 탈출시키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남편만 먼저 남한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최순애: 남편은 1년 먼저 중국에서 남한으로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 배 탈래도, 한 명당 5-6만원 내야 되는데 21명이면 1000만원이 넘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남편은 남한으로 들어오다 제주도서 잡혔습니다. 제주도서 잡혔으니 다행이지 중국에서 잡혔으면 북으로 호송해 가죠. 완전히 역적이죠. 중국 조선족들 50여명 같이 있었답니다.

탈북자 있는가 물어봐서, 남편이 손을 들었답니다. 안기부서 데러가, 대성공사, 하나원 각각 3달 씩 있다, 정부에 가서, 가족이 다 중국에 있다, 데려와야 한다면서 여권 달라고 부탁. 남한에 들어오면 1년간은 해외에 못 가는데, 남편은 정부에 한 두 달을 계속 제기하고 해서, 1년 만에 그래도 빨리,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최순애 가족이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남편은 공안의 양어장에서 물고기를 지키는 일을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탈북자를 잡아 북한에 넘기는 중국공안이지만, 특수부대 출신으로 주먹 세고, 훈련 잘 받는 남편을 신뢰했다는 최순애 씨의 말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남한으로 가고 몇 달 후, 공안은 나머지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놓고 남편에게 돈을 요구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최순애: 저희가 중국서 공안 양어장을 돌봤습니다. 이 전에는 물고기 도둑이 그렇게 많았는데, 남편을 쓰고 나서 많이 줄어들었답니다. 남편이 특수부대에 있어 훈련도 받고 해서 힘이 있고, 북한 사람 잡아서 북한에 보내는 공안인데, 워낙 고기 도둑이 많으니까 북한 사람들이 주먹도 세고 하다니까 저희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희를 공안서 먹여 살렸죠, 일 년 반 동안. 식량도 다 대주고. 그런데, 남편이 남한 간 후 몇 달 되니까, 남편 어디 갔는 가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곳 파출소에 남편과 의형제를 맺은 사람이, 공안 측에서, 남편에서 천 만원 주면 가족 풀어준다며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어서 여길 떠나라 했습니다. 저희는 처음 연변에 있었는데, 흑룡강으로 들어갔습니다.

흑룡강에 있다가, 공안이 저흴 잡아라 하는 지시가 나서, 다른 곳으로. 그 와중에 남편이 달러를 가지고 중국에 와서 만났습니다. 달라 랑, 또 지도를 그려가지고 왔습니다. 중국 난징으로부터 해서 (베트남) 사이공 해서 죽 약도를 그려왔습니다.

대가족을 이끌고 국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많아 밤에 오히려 더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 최순애 씨의 말입니다.

최순애: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까지 우리가 걸어왔습니다. (제 가족) 21명이 걸었지요, 한 달 20일 걸었지요. 낮에는 산에 있고, 밤에는 걷고. 21명을 다 데리고 활동하자니, 다른 사람들은 한 둘 이나 혼자니까 국경을 넘을 라 해도 쉽지만, 저희는 21명이 줄을 서야 하니까.

밤에가 더 위험할 것 같더라구요. 아이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밤에 안 나오고, 대 낮에, 넘었지요. 죽으면 죽고, 잡히면 잡힌다는 심정으로 왔습니다. 그러다 베트남 국경 넘다가 잡혔단 말입니다. 거기서 잡혀가지고, 한 10-15일 있었습니다.

베트남 당국은 남편이 건네준 지도도 빼앗아 갔습니다. 최 순애 씨는, 북한에 가서 죽느니 차라리 외국에서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아이들과 통사정을 했습니다.

최순애: 아이들이랑 울고 불며, 남편이 남한에 있다, 거기 가야 한다, 북한에 가면 죽는다고 사정했습니다. 번역원이 한국말을 잘 했는데, 대장같이 높은 사람들한테 우리 얘기를 전달했죠. 군대에 높은 사람이 와서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를 보더니, 그 사람들도 자식이 있고 처가 있고 하니까. 또 아이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베트남 군대 대장 같은 사람 붙잡고, 우린 한국 가야 산다고 울고불고 하니까, 또 이걸 번역원이 전하니까 결국, 도장을 하나 탁 찍어 주더라구요.

최 씨는 베트남에서 받은 도장만 있으면 캄보디아 등 다른 나라 국경도 무사히 통과할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최 씨 가족은 캄보디아 국경에서 저지를 당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야밤에 캄보디아 사람에게 뇌물을 주고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들어갔습니다.

최순애: 그 다음부터 걸어서 태국까지 왔습니다. 보초망이 10리에 하나 씩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숨죽이며 태국까지 왔습니다. 태국에서 20일 있다가 태국의 한국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한국교회서, 우리 한국가고 싶다, 남편이 한국에 있다, 도와 달라 했습니다. 교회에서 한국영사에 연락을 했죠.

남한 생활 4년이 지난 현재, 최 씨의 6남매는 학교도 잘 다니며, 비교적 빨리 남한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올해 27살이 된 큰 딸을 결혼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최 씨가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남한에 와서 곧바로 병원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것도 5개월 만에 그만뒀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밥을 굶고 학교에 가는 것을 차마 두고만 볼 수 없었다는 최 씨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가계 수입이 많지 않아 최 씨는 돈을 벌 궁리를 하게 되고, 서울 우이동에 식당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우이동 식당도 1년 반 만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최순애 씨가 남한에서 사업을 하며 사기를 당해 투자했던 돈을 모두 날리는 등 순대 집을 열기까지 고생했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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