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기획 “동독 난민 이야기” -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2005.06.09

지금은 사라진 동독이란 나라는 냉전 시절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있다 지난 90년 서독에 의해 전격적으로 흡수 통일된 나라입니다. 당시 동서독 통일의 물꼬를 튼 데는 공산주의 붕괴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서독행을 감행한 동독 난민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은 동서 베를린 분단의 상징이었던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를 소개해드립니다.

독일 베를린 시 한복판에 있는 프리드리히 거리 (Friedrichstrasse)에는 하얀색 줄이 두껍게 그어져 있습니다. 냉전기간 동안 베를린이 동서로 갈라졌을 때 양측의 경계선으로 쓰였던 선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계선을 따라 1961년에 세워진 콘크리트 장벽이 베를린 시를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는 이 장벽에 숨통을 터놓았던 몇 안 되는 통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검문소는 동서베를린을 왕래하는 외국인들만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서독을 점령한 연합군 부대원들과 가족들은 이 검문소를 통해서만 동베를린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검문소 앞에는 영어와 러시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로 “당신은 미군 점령지역을 떠나고 있습니다”라고 쓰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안내판이 말해주듯이 체크포인트 찰리는 냉전기간 동안 독일의 분단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벽에 둘러싸여 동베를린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 검문소를 통해 동베를린을 탈출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베를린으로 탈출한 동독 난민들의 신원조사를 맡았던 미국 공군 소령 애릭 코메츠 (Arik Komets) 씨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Arik Komets: 70년대쯤부터는 미군뿐만 아니라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소속의 연합군 병사들의 차를 모두 검문했습니다. 동베를린을 다녀온 장병들의 차가 검문소 구석을 돌아서 동독 국경수비대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접어들면 연합군 경찰이 자동차 짐칸을 열게 했습니다. 동베를린 여인들을 짐칸에 숨겨서 들어오는 장병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미군 사령관은 이것이 소련과의 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검색을 강화했던 겁니다.

체크포인트 찰리를 아는 사람들은 40여 년 전 열여덟 살의 나이로 숨진 청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터 훼흐터 (Peter Fechter)라는 이름의 이 동독 청년은 베를린 장벽의 보수 작업을 맡은 벽돌공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1년 동안 훼흐터는 서베를린에 있는 누나를 만나기 위해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62년 8월 같이 일하던 친구 헬무트 쿨베이크 (Helmut Kulbeik)와 함께 마침내 장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300미터도 안 되는 이곳에서 친구 쿨베이크는 무사히 장벽을 넘어갔지만, 훼흐터는 동독 국경수비대가 쏜 총에 맞아 장벽을 넘지 못하고 바닥에 다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의 알렉산드리아 힐데브란트 (Alexandria Hilderbrandt) 관장은 훼흐터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Alexandria Hilderbrandt: 훼흐터는 한 50분 동안 울면서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달려와서 훼흐터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동독 국경수비대는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게 돼 있었습니다. 마침 장벽 반대편 전망대에서는 서방 관광객들과 기자들이 총소리를 듣고 훼흐터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렇지만 미군 경비대도 소련군 점령지역까지 들어가서 훼흐터를 구해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훼흐터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훼흐터의 죽음이 알려지자 흥분한 서베를린 사람들은 동독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규모 항의시위를 벌였습니다. 코메츠 씨의 말입니다.

Arik Komets: 서베를린에 나치 전범들이 수용돼 있는 감옥이 있었는데요, 2차대전 전승국들이 돌아가면서 경비를 섰습니다. 훼흐터가 죽은 뒤에 마침 소련군이 경비를 서기 위해서 서베를린으로 들어갔는데 시위대가 소련군 수송버스에 돌을 던지면서 앞을 막아섰습니다. 결국 소련군은 동베를린으로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서베를린에는 훼흐터가 숨진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90년 독일이 통일된 뒤에는 훼흐터가 숨진 자리에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97년에는 훼흐터가 죽은 지 35년 만에 훼흐터에게 총질을 했던 동독 국경수비대 두 명이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살인죄가 인정돼서,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주간기획 “독일난민 이야기” 오늘은 베를린 장벽에 설치됐던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를 소개해드렸습니다.

김연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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