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평양아 저자 김찬구 - 16년 대북 사업 여정, 북한은 준비되지 않았다


2005.11.01

69세의 재미동포 사업가 김찬구 씨는 16년 동안 북한을 드나들면서 자본주의 식 사업을 벌여온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 씨는 최근 자신의 북한 방문과 사업 경험을 책으로 정리한 ‘아 평양아’를 출간하고 대북 사업과에 관한 인터뷰와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찬구 씨가 북한에서 16년 동안 진행했던 사업은 모두 6개. 한 푼의 이윤이 보지 못한 고생길이었지만 김씨는 대북 사업과 함께한 세월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김찬구 씨가 전하는 북한에서의 사업 이야기 두 차례에 걸쳐 보내드립니다.

김찬구 씨가 북한에 처음 방문했던 때는 해외동포의 북한 방문이 허용된 이후 첫 해인 1989년입니다. 경남 김해 출신으로 북한 땅에 친인척도 없었던 김 씨는 당시 소련 영해에서의 북한 선박의 고기잡이 사업에 관심을 두고 사업 상담 차 북한 땅을 처음 밟습니다.

김찬구: 내가 그동안 62번 북한 방문에 여행비로 날린 돈만 백만불은 될 꺼에요.

김씨는 이후 골뱅이 통발 사업, 선박 수리고, 봉제 완구 공장 그리고 남한 구두 회사 엘칸토 평양 공장 설립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6 가지가 넘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김씨는 가장 좋았던 시절로 봉제 완구 공장이 잘 운영되던 때를 꼽았고 엘칸토 구두 평양 공장 설립 때도 기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씨가 운영했던 사업들은 준비만 하고 시작도 못하거나 공장 가동 중간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북측은 김씨에게 공장문을 닫아야할 정도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오기도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도 많았다고 김씨는 회상했습니다. 또 함께 일하던 북쪽 사업 담당자를 별 이유없이 바꿔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계약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김씨는 결국 북한에서의 사업에서 한 푼의 이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김찬구: 한번은 임가공 임금을 주는 데, 1달라 주던 것을 100% 올라달라고 했어요. 요구를 들어줄려면 공장문 닫아야 했거든. 내가 왜 2 달러를 줄 수 없는지 다 데이터를 만들어서 줬는데 북한 당국도 내 주장을 알아는 들었어요. 근데 알아듣는 것은 알아듣는 것이고 결국 2달러로 올리라고 지령이 내렸왔어요.

김씨는 북한에 들어간 사업가가 부딪치는 가장 큰 벽으로 북한 사회의 조직 체계의 문제로 꼽았습니다. 풍부한 노력동과 노동자들의 빠른 기술 습득력, 좋은 손재주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북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사업자가 이 같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요구하면 관계 당국과 충돌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그 때마다 김씨는 북한 체제의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김찬구: 제일 첫째 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면 투자자가 자기는 자본주의 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꾸 운영 관리에 대해 의견을 내놓을 때쯤 되면 짜르는 거에요. 무슨 핑계를 대던 대서 짜릅니다. 될만하면 이렇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는데 지금 세월이 흘러보니까...이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남한 기업도 이런 시기에 같은 일을 당하고 했습니다.

특히 김씨는 북한 정부가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본주의식 사고를 금지하기 위해, 공장이 문을 연 뒤 2-3년이 지나면 반드시 문을 닫게 만드는 조치를 취했으며 이 같은 관행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고 말했습니다.

김찬구 씨는 최근 16년간의 대북 사업의 경험을 담은 책을 출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손해를 보면서도 사업을 계속 해온 이유를 제일 궁금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김찬구: 같은 말 쓰고 한 민족이니까 체제는 다르지만 내가 가르치고 하면 괜찮겠지 했는데 아니었어요. 1,2년에는 아무것도 몰랐지. 시간이 좀 지나서 3년째되니까 안 되겠다 생각이들더라고. 근데 자꾸 예전에 다녔던 어촌 사람들 생각이 머릿 속에 지나가더라고. 이게 왜 우리는 이렇게 사나. 크게 말하면 통일 밑거름 이런 것 아니고 사람이 먹고 살아야하니까 사람들의 불쌍함에 머리에 자꾸 베겨서...

김 씨는 실제로 북한에서의 사업의 자신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북한의 어려운 식량 사정을 설명하면서 끼니마다 음식을 남지기 못하게 했고 또 부모님이 운명했을 때조차 평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찬구: 우리 어머니는 나 평양에 다니는 거 모르고 돌아가셨지.

그러나 김씨는 북한에서 자신이 얼마 만큼의 손해를 봤던 지난 16년 동안의 자신의 대북 사업 활동를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김찬구 씨에는 지금도 북한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김씨의 조언을 사업을 시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김 씨는 북한에 처음 발을 들어놓았던 89년부터 마지막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2002년까지 북한 당국의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이런 상황은 아직도 북한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실패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찬구: 기회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시작한 것이 사실은 너무 일찍 시작했지.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지금쯤은 변화가 왔었어야 해요 지금 현대 보세요. 나도 그렇게 속아 왔으니까.

김씨는 북한 당국이 체제 유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대북 사업의 성공은 요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이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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