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휴전 협정일에 대한 뉴스해설

200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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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은 1950년 여름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1년만에 양측이 피차 전투를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난 다음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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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 동생을 등에 업고 있는 소녀

그런데 양측이 서로 양보 못하고 왜 2년 이상 협상이 지연 됐는지 그리고 휴전 발효일 발효 시간 1분 전까지 왜 서로 폭격하고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었는지 살펴봅니다. 진행에 안재훈 기자입니다.

지금 베이징에서는 7월 26일부터 6자회담이 열려서 북한의 핵폐기 문제, 체제보장문제, 경제원조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한편, 23일 평양중앙방송에서 52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휴전협정을 영구적 평화조약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7월 27일은 남북한 모두에게 의미가 큰 날입니다. 바로 52년 전 이날 휴전협정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이 날을 7월 27일, 조국 해방 전쟁 승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어느 한쪽이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임시로 전투를 중단한다는 휴전협정이지 평화조약은 아닌 것입니다. 남한측은 이 조약에 서명조차 안 했습니다.

휴전 발효 당일까지 하루 한 시간까지 조금이라도 땅을 더 뺐으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언덕하나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 속에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한국동란은 유난히 민간인의 피해가 많은 전쟁이었습니다. 그 희생자의 규모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100만에서 200만 명 정도로 추산을 하고 있지만 전쟁 기간 중에 좌익, 우익 간의 보복이 끊임없이 있었기 때문에 납치, 학살, 그리고 실종자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미국 비행기는 휴전 발표하는 날 1분전까지 공습을 했습니다. 휴전 협정 논의의 발단은 1951년 7월 10일부터 더 싸워봐야 한쪽이 승리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회담은 2년 동안 순조롭지 못하고 큰 진전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휴전협정에는 두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군사분계선의 위치였고 다른 하나는 포로 교환 문제였습니다. 유엔측은 군사접촉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제의했고 북한측은 예전의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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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에서 이루어졌던 포로송환 대담

결국은 휴전발효 당시의 군사대치선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7월 27일 휴전 발효 당일까지 하루 한 시간까지 조금이라도 땅을 더 뺐으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언덕하나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 속에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해서 북측은 전원 송환을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미국측에서는 이미 상당수가 공산권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자원 송환을 제의했습니다. 이에 북측은 재빨리 많은 국군포로를 인민군에 편입시켜 재교육 시킨 후 해방전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지루하게 펼친 휴전 논쟁 속에 남측의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2만 7천명을 수용소에서 미국의 반대하고 불구하고 풀어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편, 북한은 미국이 후방에서 세균전을 펼쳤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유엔을 통해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제의했으나 북한은 유엔도 미국의 영향하에 있다고 판단, 조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들이 해결을 보지 못하고 1953년 7월 27일 막을 내린 것이 휴전 협정입니다.

안재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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