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특집: ‘한국전 예수’ 고향에 잠들다] ② 고향에서 시작된 카폰 신부의 희생

캔자스-박수영, 김구슬 parkg@rfa.org
2021-10-08
Share
[RFA 특집: ‘한국전 예수’ 고향에 잠들다] ② 고향에서 시작된 카폰 신부의 희생 에밀 카폰 신부 생가의 최근 모습.
/RFA Photo

앵커: 총탄이 빗발치던 한국전쟁에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포로수용소에까지 주변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던 에밀 카폰 신부의 희생은 그의 고향인 미 캔자스주 필슨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카폰 신부의 고향에서는 어린 시절 그의 봉사 정신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RFA 특집, [‘한국전 예수’ 고향에 잠들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작은 시골 동네인 필슨에서 보낸 카폰 신부의 어린 시절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박수영 기자가 담아왔습니다.

사랑과 섬김을 배우며 자란 카폰 신부

에밀 카폰 신부의 장례 미사가 열린 지난 9월 29일 오후.

카폰 신부의 유해가 성당에 안치된 이후 RFA 취재진은 카폰 신부의 생가 인근에 있는 ‘카폰 신부 박물관’ (The Father Kapaun Museum)을 찾았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카폰 신부의 사제복과 군모 등 그를 추억하는 그림과 물건들로 가득했습니다.

박물관 관람 안내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해리엇 비나 씨는 이곳에서 카폰 신부의 업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카폰 신부의 장례 미사가 끝났지만, 그의 귀향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개인적으로 저는 카폰 신부가 집에 돌아오기를 70년 동안 기다렸어요. 카폰 신부의 유해가 마침내 캔자스로 돌아왔다는 것을 아직도 믿을 수 없습니다.

비나 씨는 카폰 신부와 관해 보고 들었던 기억들을 RFA 취재진에 하나씩 풀어냈습니다.

비나 씨는 카폰 신부가 어린 시절 용기의 상징이었다며, 카폰 신부가 명예 훈장을 받을 때, 그가 한국에서 송환될 때, 참전 노병들이 카폰 신부에 대해 말해줄 때, 그리고 아서 토니(Arthur Tonne) 신부가 카폰 신부에 관한 책을 펴낼 때도 모두 지켜봤습니다.

특히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 카폰 신부가 명예 훈장을 받는 날 들떠있던 본인과 달리,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그의 부모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카폰 신부의 이야기는 항상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쓸 때마다 카폰 신부에 대해 썼습니다. 반 친구들이 그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길 원했거든요.

Kapaun_Museum.jpg
해리엇 비나 씨가 카폰 신부 박물관을 안내하고 있다. /RFA Photo


비나 씨는 한 수녀에게 들을 이야기도 전해줬습니다. 카폰 신부가 어렸을 때부터 등교하거나 짧은 기도를 올리기 위해 5km를 걸어 다닐 정도로 성실했고, 주변 사람들도 잘 섬기는 아이였다는 겁니다.

[해리엇 비나] 수녀님 말씀에 한 번은 휴식 시간에 아이들 중 한 명이 사라져서 모두가 그를 찾았다고 합니다. 수녀들 중 한 명이 계단을 올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는데,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작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릴 적 카폰 신부였습니다.

비나 씨에 따르면 카폰 신부가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력도 컸습니다.

[해리엇 비나] 카폰 신부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나이 든 사람들과 또래 학생들을 존중하라고 가르쳤어요. 전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일화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카폰 신부는 그의 부모님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배움을 얻는 사람들을 도우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카폰 신부의 부모가 두 아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 아주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children_bicycle.jpg
필슨 성당에서 에밀 카폰 신부와 아이들 (왼쪽) / 워싱턴 DC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카폰 신부 (오른쪽). /위치타 교구 제공


친구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 카폰 신부

RFA 취재진은 필슨에서 1시간 반 가량 떨어진 위치타 근처 성당에서도 카폰 신부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존 호즈 신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복 시성 절차를 전공하고, 20년 넘게 카폰 신부의 생애와 업적을 조사해온 성 미카엘 성당 소속 교구장 대리인 존 호즈 신부는 카폰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연구하던 중 카폰 신부의 어릴 적 학교 친구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존 호즈]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켄릭 신학교에서 온 카폰 신부의 급우 중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각종 학교 서류로 가득한 공책을 찾았다면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나눠준 수업 자료라고 말했습니다. 필기장 같은 것인데, 생물학 수업도 역사 수업 필기도 있다고요. 우리는 이 모든 수업 자료들을 갖고 있다며 당신도 갖고 있지 않냐고 말했죠. 그러자 그는 저를 보고 말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요. 모두 카폰 신부가 나눠준 필기장이었던 겁니다.

호즈 신부는 그가 찾은 수많은 양의 필기장과 수업 자료를 모두 카폰 신부가 직접 만든 것일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카폰 신부가 학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손수 제작한 것임을 금세 깨닫게 됐습니다.

[존 호즈] 그가 말하길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은 경제 대공황 때”라고 말했습니다. 학교에는 나눠줄 물건도, 인쇄할 돈도, 재원도 없었다고 했죠. 카폰 신부가 수업에 가서 필기를 하고, 수업이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 수업 내용을 컴퓨터 타자로 쳐서 복사본을 만들었다고 그가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거나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카폰 신부를 찾아갈 수 있었고, 카폰 신부가 그 학생들에게 필기 노트를 주었다는 겁니다. 덕분에 그가 재학 시절 내내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 심지어 신학교에서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폰 신부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고 도왔는데요. 이는 카폰 신부가 행한 일화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 한국전으로 향하다

캔자스 주에 위치한 뉴먼 대학에서는 카폰 신부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 ‘카폰 신부의 기적(The Miracle of Father Kapaun)’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이 연극에서 카폰 신부 역을 맡았던 트레버 파니 씨는 그가 폭력을 싫어하면서도, 도움이 절실한 전쟁터에 발 벗고 나선 그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트레버 파니] 카폰 신부는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단순히 사랑만을 전파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카폰 신부는 도움이 필요한 곳을 알아채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기 위해서 스스로 몸을 던졌어요. 카폰 신부는 이 작은 마을 필슨에서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대신에 폭력을 막기 위해 한국으로 갔습니다. 현재 한국 전체는 아니지만, 한반도의 절반은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카폰 신부가 이렇게 상충하는 두 원칙을 동시에 고수하면서도 매우 단호하게 행동한 면모를 존경합니다. 저는 항상 어떻게 하면 카폰 신부처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카폰 신부는 1946년에 참전한 2차 세계 대전에서 무사히 돌아왔음에도, 또 다시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카폰 신부의 어머니는 그가 참전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카폰 신부가 첫 번째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라 생각했고, 다시 전장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카폰 신부는 그의 어머니에게 “당신은 매일 미사에 갈 수 있고, 매일 여기에 와서 성찬식을 할 수 있지만, 전쟁터의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고, 제사장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카폰 신부는 다시 군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비나 씨에 따르면 카폰 신부는 한국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카폰 신부는 필슨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카폰 신부는 동생 유진에게 “이번에는 집에 못 올 것 같아”라고 하며 그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노정민, 웹팀 김상일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