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영국 외교관 부인의 평양 체류기] ① 출산보다 직업 원하는 여성들
2021.02.05
앵커: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사회 중 하나로 꼽히는 북한의 실제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일상은 대부분 베일에 가려진 채 외부인에게는 제한적 접근만 허용됩니다. 서방 외교관의 배우자로 평양에서 2년 동안 생활했던 영국인 린지 밀러 씨의 진솔한 평양살이 경험은 흔치않은 북한알기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눈에 띕니다.
평양 상류층 여성들은 이 이방인 친구에게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인 북한에서 살아가는 답답함과 출산과 육아보다는 세계 여느나라 여성과 마찬가지로 직업을 가진 ‘커리어 우먼’으로 살고 싶다는 욕심도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RFA 특별기획, 영국 외교관 부인의 평양 체류기],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린지 밀러 씨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2년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보고 느꼈던 진솔한 일상을 천소람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린지 밀러] 길거리에서 북한 주민들과 굉장히 좋은, 정말 아름다운 대화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가족들이 와서 저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밀러 씨가 평양주재 영국 대사관으로 발령난 외교관 남편을 따라 처음 북한 땅을 밟은 건 2017년. 남편의 임기를 마치고 2019년 북한을 떠나올 때까지 2년 남짓한 짧은 체류였지만 당시 ‘평양살이’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바꿔놓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린지 밀러] 북한에 도착했을 때의 저와 떠날 때의 저는 더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이방인
[기자] 북한주민과 이야기하거나 만나는 것에 있어 제약이 있었나요?
[린지 밀러] 외국인 거주자들이 지켜야하는 규칙과 제약이 있었죠, 관광객들과는 굉장히 달라요. 예를 들어 택시 혹은 버스를 탈 수 없었죠. 버스에서 북한 주민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죠,…(중략) 북한 주민의 집 방문도 불가능했어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순 없었지만 평양에서 쇼핑하거나 식당에서 외식은 물론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는 건 꽤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평양 거리에서 마주친 주민들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많은 북한 주민들이 기본적인 영어 회화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과 항상 자유롭게 이야기할 순 없었습니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녀와 대화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듯했습니다.
평양 시내의 많은 상점 역시 파란 눈의 ‘이방인’을 선뜻 반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가게를 방문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상점 안에 있었지만 그에겐 ‘영업이 끝났다’는 점원의 안내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외국인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린지 밀러] 저의 존재가 아마 그들에겐 스트레스였지 않을까요?
정 많고 친절한 북한 친구들
[기자] 북한 주민들과 대화를 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린지 밀러] 그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항상 그들이 자유롭게 대화하지 못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관계가 굉장히 복잡했어요.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 이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아닌지 말이죠.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을 알아가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저에겐 쉬운 일이었지만, 그들에겐 아마 다른 이야기겠죠?
그가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른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린지 밀러] 북한에 대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점은 주민들이 굉장히 다정하고 인심이 좋으며 친절하다는 점이에요,…(중략) 정치적인 부분에 가려져서 그 이면에 (북한에서도) 사람들 (이 일상생활을 살아가고 있다는) 부분이 많이 간과되고 있어요. 이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 여러 제약이 있었을 텐데 북한 친구들을 어떻게 사귀었나요?
[린지 밀러] 사람들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잖아요,…(중략) 저 역시 정치에 관심이 있었지만 정치 얘기만 하고 싶진 않았어요. 우리 모두 정치적 견해를 뛰어넘는 인간적인 면모가 있잖아요. (관계를 맺기까지) 저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편이었어요. 종종 제가 친해진 북한주민들과는 가족사, 미래희망, 스포츠, 티비, 음악, 취미, 술, 노래방 등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어요. 북한 친구들 중 일부는 제가 가르치던 요가 수업에 참석하기도 했어요.
한계도 물론 있었습니다. 북한 친구들과 단편적인 얘기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정말 나를 친구로 생각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출산 대신 직업을 원한 평양 여성들
그녀가 북한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 사회에서는 상위 권력계층이었고 외부인들과 접촉도 많이 경험해본 상태였습니다. 때론 남성 중심의 북한사회에서 젋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갑갑함을 솔직히 털어놓는 북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린지 밀러] 친밀도가 생기고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을 때, 일부는 저에게 미묘하고 사소한 것들을 솔직하게 밝히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여성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강요하는 권력층 혹은 군인들의 행동에 대한 불만 같은 걸 제게 털어놓았어요. 젊은 평양 여성에게 북한 사회가 얼마나 압박감을 주는지 등에 대해 말이죠. 그들은 아이를 낳기보단 직업을 가지고 싶어했어요. 현대 여성의 딜레마 같은 거겠죠.
그는 평양 시내 문수동에서 살았습니다. 문수동은 각국 대사관, 여러 국제기관, 그리고 국제 구호단체들이 들어선 외교단지였는데 가끔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북한에서 운전면허증을 딴 뒤 차를 운전해 근교 바닷가와 산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자유도 이따금 누렸습니다. 외국인에게만 허용된 자유로움이었습니다.
[린지 밀러] 바닷가를 찾거나 산을 오르곤 했죠. 일부 북한 주민들이 살면서 볼 수 있는 광경보다 제가 북한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바닷가를 한번도 보지 못한 북한 주민들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바닷가를 볼 수 있었죠.
깨끗하고 빳빳한 달러만 받는 사회
그는 영국을 떠나기 전, 북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화인 달러, 유로, 혹은 위안화를 가지고 오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구겨진 달러는 사용할 수 없는 북한의 외화통용 방식에 익숙해지는 데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린지 밀러] 북한에서 처음으로 돈을 쓴 건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북한 운전자와 함께 차를 타고 공항에서 떠나던 참이었죠. 주차장 티켓부스에서 커튼 뒤의 여성이 1달러를 달라고 했고, 운전자가 통역을 해줘1달러를 줬는데 그 돈을 받지 않았어요. 구겨지고 더러워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빳빳한 달러를 원하더라구요.
평양에선 물건을 산 뒤 거스름 돈 대신 껌, 쥬스 같은 간식거리를 받는 것도 흔한 경험이었습니다.
[린지 밀러] 만약 북한 ‘원’을 원한다면,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마켓에 가면 환전 부스가 있습니다. 혹은 백화점에서는 잔돈으로 북한 원으로 거슬러 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외국인들은 자동화폐입출금기 (ATM)를 사용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미리 현금을 가지고 북한에 들어와야 했죠. (북한을) 떠나서 현금을 다시 가지고 들어오거나, ….
[기자] ATM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는데, 현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했나요?
[린지 밀러] 누군가 평양을 떠나거나 다시 돌아올 때, 그 사람들에게 현금을 부탁하기도 했죠. 많은 사람들이 북중 국경지역인 중국 단둥에 가는데, 단둥에는 ATM기가 있어요. 그래서 짧은 휴식 혹은 의사를 만난다든가, 쇼핑하러 단둥에 갈 때면 대신 현금을 인출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죠.
낡은 체제 속 그리운 친구들
바깥에서 본 북한의 모습과 그 속에서 주민들과 직접 부대끼며 경험한 북한은 매우 달랐습니다.
비록 정부의 통제와 감시는 엄격했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북한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린지 밀러] 정치와 별개로 한걸음 물러나 북한을 본다면, 북한 주민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외교관 배우자로 평양에서 보낸 2년은 매우 뜻깊었고, 북한 친구들도 꽤 사귀었다는 그는 정작 북한이 그리울 때면 알 수 없는 죄책감도 느낀다고 털어놓습니다.
낡은 체제를 고수하고 있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친구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곳은 그에겐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