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 어제와 오늘] 수해민의 분노

워싱턴-박정우 parkj@rfa.org
20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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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수해지역을 취재한 당시 현장에서 제공받은 수해피해상황을 적은 자료들. ‘풍수해자료, 황해남도 봉천군 풍수해 지휘부’라고 씌어진 표지가 붙어있었다.
1996년 수해지역을 취재한 당시 현장에서 제공받은 수해피해상황을 적은 자료들. ‘풍수해자료, 황해남도 봉천군 풍수해 지휘부’라고 씌어진 표지가 붙어있었다.
사진: 문성희

앵커: 언론인이자 학자로서 북한 문제, 특히 경제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뤄온 문성희: 박사와 함께 짚어보는 ‘북한 경제, 어제와 오늘’ 시간입니다. 문성희: 박사는 현재 일본 도쿄에서 시사 주간지, 슈칸 킨요비(주간 금요일) 기자로 한반도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고 2017년 도쿄대에서 북한 경제분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북한에 나타나고 있는 시장경제체제의 현황과 그 가능성을 짚어보고 개선돼야 할 점까지 중점적으로 살펴봅니다. 대담에 박정우 기자입니다.

<기자> 태풍 8호에 이어 태풍9호로 인한 북한의 피해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황해남북도에 이어 함경남도의 피해 현장에 직접 가서 시찰하고 거기서 평양의 전체 당원들에게 함경남북도의 피해 지역에 와서 복구사업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는 데요, 문 박사님, 김 위원장의 이례적인 행보, 어떤 배경으로 봐야 할까요?

문성희 박사
문성희 박사 (사진 제공:문성희)

문성희: 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가 스스로 태풍 피해 지역에 가는 것도 드문 일이고, 더군다나 거기서 평양 당원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일은 제가 기억하기에는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중앙위원회 정무국 확대회의도 현지에서 진행했고요. 거기서는 함경남도 당위원회 위원장의 해임도 통보되었습니다. 이번에 함경남북도의 특히 해안지대에서 피해가 심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한 것에 대해 김 위원장이 엄하게 지적한 것 같아요.

<기자>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이지요?

문성희: 네, 그렇다고 봐요.

<기자> 좀 전에 북한에서 최고지도자가 재난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게 드물다고 하셨는데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문성희: 네, 김 위원장이 재해지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닙니다. 2018년인가 북부의 나선지역에서 수해가 났을 때도 현지에 가서 진두에서 복구 지휘를 했어요. 현지에 직접 가는 것이 김정은 위원장의 하나의 현지지도 스타일이 아닌가, 그런 느낌도 들어요. 자신이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만큼 젊은 지도자가 기동력이 있다는 것으로 인민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느낌도 들어요. 반면에 올해는 다른 간부들도 재해지에 파견되었는데 역할 분담이라 할까요. 김 위원장 뿐이 아니라 중앙의 간부들이 모두 복구사업에 나서고 있는 모습은 인민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그렇지만 결국 코로나19와 재해로 심각한 경제난에 내몰린 상태에서 보여주기식 애민행보에만 매달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문성희: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다 가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요?  북한 인민들로부터 보면 최고지도자가 자기들의 처지를 알아주었으니 뭔가 대책을 취해주겠지 라는 기대감은 생긴다고 생각해요.

<기자> 1996년 조선신보 평양특파원 시절 수해지역 여러 곳을 취재하셨지요?

문성희: 네, 1996년에는 주로 황해남북도, 개성시 등 서남쪽에서 수해 피해가 컸기 때문에 주로 그 곳을 1주일 가까이 걸려서 돌았어요.

<기자> 아무리 수해라 하더라도 북한 당국이 부정적인 측면이 나오는 취재를 허락했다니 좀 놀랍군요.

문성희:네, 북한에서는 그 전 해인 1995년에 큰 수해가 났습니다. 예외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고 조선중앙TV에서도 피해 상황을 찍은 동영상을 보냈지요. 그래서 국제사회가 다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1996년에도 수해로 인한 피해 상황이 세계에 전해진 것 같애요. 저는 현장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북한에 있으면 오히려 모르는 법이에요.  북한에서 또 수해가 일어났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도쿄 본사에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반드시 취재를 하라고. 마침 나진 선봉에서 돌아온 때였는데, 피로도 풀 사이 없이 취재 준비를 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나진 선봉에 가고 있을 때 평양에 남아있던 운전기사한테 들어보니 대동강 수위가 올라 범람할 뻔 했다고 하니, ‘피해는 장난 아닐거다’ 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처음부터 순조로히 취재에 응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한에서도 부정적인 뉴스가 나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조선신보 기자라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 언론인한테 현장을 보여도 좋겠는가, 많이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취재 허가가 내릴 때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만 취재 허가가 나온 뒤에는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마음대로 취재하라”는 것으로 제약은 전혀 없었습니다.

<기자> 주로 어느 지역을 방문했나요?

문성희: 황해남북도와 개성시입니다. 처음엔 평양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황해북도 송림시에 갔어요. 거기에는 유명한 황해제철연합기업소가 있어요. 거기가 1m나 침수했답니다. 물론 우리가 갔을 때는 물은 다 빠지고 있었지만 흙탕이 그대로 남아 있어 피해가 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지에 들어갔을 때는 수속도 있고 해서 피해 당일부터 며칠 시일이 지나간 뒤었거든요.  송림에서는 카메라맨이 수해 당일에 찍은 사진을 제공받았어요. 당시는 디지털이 아니라 필름이었는데, 그걸 현상해보니 남성이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트럭 바퀴도 물에 잠기고 있는 그런 사진이었어요.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그 사진 한 장만 봐도 알 수 있었어요.

<기자> 그 당시에도 농촌에서도 피해가 컸던가요?

문성희: 그럼요.  황해남도 배천군 석산리에서는 제방이 무너진 곳을 취재했어요. 군 행정경제위원회 도시경영과장이 나오시고 안내를 해주셨는데, 진흙으로 덮어진 논밭에 데려가 주셨어요. “여기는 모두 논이었습니다”라고 하시는데 도저히 믿기질 않는 거에요. “야, 이건 또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인가”라고 마음속으로 정말 걱정했어요. 취재 갈 때마다 무너진 다리를 많이 보았고, 어느 때는 강물 속을 자동차가 달리기도 했어요. 그렇게 달리는 도중에 한 번은 자동차가 균형을 잃고 전도할 뻔 했어요. 그러나 운전기사가 경험이 많은 분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전도하지는 않고 살았어요. 정말 그런 험한 길을 취재한 것은 처음이었지요.

<기자> 진흙으로 뒤덮인 논밭을 보고 북한 주민들도 실망이 컸겠군요.

문성희: 물론 그렇다고 생각을 해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논밭을 덮어버린 진흙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지게로 진흙을 옮기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진짜 넓은 벌판에 수백 명 정도가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데 한 아저씨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이런 실상을 전부 촬영해가라.” 아저씨는 아마도 우리가 평양에서 내려온 북한 언론인이라고 착각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모두 찍고 간부들에게 보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아저씨의 마음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어요. 지게라는 원시적 도구로 드넓은 평야를 뒤덮은 진흙을 운반하는 끝없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속에서 해야 되니 북한 당국에 말이라도 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었어요.

<기자>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맨손으로 수해 복구작업에 내몰린 수해민들의 반감이 상당했겠군요?

문성희: 네, 그렇다고 봅니다.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한 들 북한 주민들이 그걸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그런데 얼마나 화가 났으면 잘 모르는 기자한테 그런 말을 했겠어요?  아마도 며칠간이나 복구작업을 계속해야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자> 그 당시 굶어 죽었던 사람들도 많았다면서요?

문성희: 재해현장에서는 죽은 것처럼 길가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했어요. 물론 많이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자> 그렇다면 수해지역을 취재하면서 일종의 공포감이라 할까, 해코지라도 당할 지 모른다는 그런 공포감은 없었던가요?

2018년 일본에서 첫 발간된 문성희 박사의 북한 경제에 관한 저서 ‘맥주와 대포동’ 한국어판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됐다.
2018년 일본에서 첫 발간된 문성희 박사의 북한 경제에 관한 저서 ‘맥주와 대포동’ 한국어판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됐다.

문성희: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했어요. 앞서 말했던 극한 상황에서도 북한 사람들의 따뜻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어요. 점심식사 장소를 제공해 준 농가의 주무는 집에서 담근 김치를 듬뿍 내주었어요. 어느 협동농장의 재해현장에 들렸을 때는 양팔로 안을 수 없을 만큼의 옥수수(강냉이)를 받았습니다. 자신들도 먹는 등 마는 등하면서도 멀리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려는 그런 깊은 배려에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어요.

<기자> 당시 수해를 보도한 기사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문성희: 조선신보에서 기사가 나오자 일본 언론들도 관심을 가졌고, 마이니치신문에는 저의 동료가 찍은 사진이 게재되고 신보를 인용하는 식으로 기사가 1면에 나왔어요. 덕분에 북한의 수해 피해 상황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고 그 뒤 국제기구나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지원 물자가 도착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많이 평가를 받은 기억이 있어요. 일본에 돌아오니까 지금 제가 속하는 “주간금요일”에서 부탁을 받고 현지르포 기사도 썼거든요.

<기자> 북한이 코로나-19와 수해로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고,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다시 겪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언론 보도도 있는데요?

문성희: 저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불리우는 1990년대 중반인 1996년에 약 4개월간 북한에 체류했어요. 그 당시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평양시에서도 상품이 떨어지고 돈이 있어도 사는 물건이 없는 거에요. 평양이 그러니 지방은 더 심했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잘 몰랐던 측면도 있지요. 사회주의제도의 혜택으로 배불리 먹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공급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식생활을 보장받았거든요. 그것이 갑자기 국가가 식량공급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되다 보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그때와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갈 방법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나 살아간다고 생각을 해요.

<기자> 오늘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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