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특집: ‘한국전 예수’ 고향에 잠들다] ③ 적군 유해까지 묻어준 카폰 신부

캔자스-박수영, 김구슬 parkg@rfa.org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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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특집: ‘한국전 예수’ 고향에 잠들다] ③ 적군 유해까지 묻어준 카폰 신부 필슨 성당 앞 에밀 카폰 신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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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세계 2차 대전에 이어 한국 전쟁에 참전한 에밀 카폰 신부는 전우들과 부상자들을 위한 헌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적군까지도 돌본 그의 희생과 사랑은 포로수용소에서 숨을 거두던 날까지 계속됐습니다.

RFA 특집, [‘한국전 예수고향에 잠들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한국전에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던 카폰 신부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를 박수영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죽음의 전쟁터에서 희망을 전한 카폰 신부 

가족의 만류에도 한국 전쟁으로 달려간 에밀 카폰 신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카폰 신부가 한국전 최전선에서 피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폈다고 말합니다. 성 미카엘 성당 소속 교구장 대리인 존 호즈 신부는 그가 카폰 신부에 대해 조사하던 중, 한국전에서 카폰 신부를 만난 노병 티버 루빈(Tibor Rubin) 씨의 이야기를 RFA 취재진에 들려줬습니다.

[존 호즈] 당시 카폰 신부가 포로로 붙잡히기 전 일화입니다. 그의 동료 군인 중 한 명인 티버 루빈 씨는 헝가리 출신이자 유대인이었습니다. 루빈 씨는 모든 병사가 전쟁터에서 그저 웅크리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총알이 그의 방향으로 날아와 완전히 갇혔던 겁니다. 루빈 씨는 그때 자신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등에 닿는 것을 느끼고 돌아서니 카폰 신부가 있었답니다. 총알이 머리 위로 빗발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았는 데도 카폰 신부는 여기저기 병사들을 살피며 그들이 괜찮은지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에서 전우들을 위한 카폰 신부의 헌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인 루빈 씨를 위해 헝가리어 기도를 외울 만큼 전우들에 대한 그의 배려도 남달랐다고 호즈 신부는 덧붙였습니다.

[존 호즈] 카폰 신부는 곧 다른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루빈 씨에게 "내가 가기 전에 기도할래요?"라고 물었답니다. 루빈 씨가 그러겠다고 하자 카폰 신부는 루빈 씨가 유대인이고, 그가 히브리어 성경을 읽는 것을 알고 히브리어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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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중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에밀 카폰 신부/위치타 교구 제공

당시 전쟁 포로들에 따르면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귀향하기까지 카폰 신부의 위로와 격려는 큰 힘이 됐습니다. 전우들에게 본인의 음식을 나눠줬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 준 것이 그들에게 용기와 삶의 의지를 복돋아줬다는 겁니다.

[존 호즈] 제가 대화를 나눴던 모든 전쟁포로가 말하길, 카폰 신부는 무엇보다도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카폰 신부님이 없었다면 아마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카폰 신부 덕분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했습니다. 카폰 신부는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 매일 이 사실을 상기하도록 도왔던 분이었습니다.

카폰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카폰 신부의 기적공연에서 에밀 카폰 신부를 연기했던 트레버 파니 씨는 연극 장면 중 카폰 신부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도 절망대신 희망을 전하려는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트레버 파니] 제가 카폰 신부를 좋아하는 부분이 그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을뿐 아니라,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누군가 굶고 있을 때는 자신의 음식도 기꺼이 포기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도 계속된 헌신과 사랑

1950 11 5, 한국전에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카폰 신부는 포로가 돼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카폰 신부는 후퇴 명령에도 부상입은 전우들을 돌보기를 선택했던 겁니다. ‘카폰 신부 박물관의 해리엇 비나 안내원은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 매서운 추위로 고통받는 수용소 생활에서도 그의 헌신과 사랑은 계속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카폰 신부는 포로수용소에서 신앙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돌봤습니다. 카폰 신부는 항상 물과 과일 등을 들고 다니며, 그가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계속 도왔어요. 그는 수용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음식을 나눠주기 전에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나 씨는 카폰 신부가 포로들을 고문하고 학대하던 적군과 간수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한 점을 강조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카폰 신부는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제롬 돌란 (Jerome A. Dolan) 박사의 자녀들이 말하길, 카폰 신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행동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라고 배운 것과 다르다며 적군이 우리에게 가한 (잔혹한) 만행을 똑같이 되갚지 않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카폰 신부는 포로수용소에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런 말을 한 겁니다.

비나 씨는 카폰 신부가 전쟁포로들에게 적군을 용서하고 서로를 더 사랑하며 도와주기를 격려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포로수용소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이 카폰 신부를 성인으로 확신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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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당시 부상병을 부축하는 에밀 카폰 신부 (오른쪽) 와 제롬 돌란 (왼쪽) /위치타 교구 제공

카폰 신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다리에 생긴 혈전과 폐렴 등으로 건강이 악화했지만,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사형수 시설에 보내졌고 결국, 1951 5 23일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카폰 신부의 희생과 헌신이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고 입을 모읍니다. 

[트레버 파니] 카폰 신부는 한국전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카폰 신부가 자신 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굶주리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특히 비나 씨는 카폰 신부가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의 유해를 직접 묻어주었다며, 그의 무한한 애민정신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해리엇 비나] 그 당시만 해도 전사자들의 유해를 집으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폰 신부는 무덤을 파고 유엔군이나 한국군, 적군의 유해를 직접 묻었습니다. 카폰 신부는 항상 "적군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형제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적군들을 묻어줬고, 주변 사람들도 카폰 신부를 도와 함께 그들을 묻어 주었습니다.

카폰 신부는 끝내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수는 없었지만, 그의 헌신으로 수많은 전우와 전쟁포로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또 카폰 신부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희생정신과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70년 만의 그의 귀향을 반기고 환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자 박수영, 에디터 노정민, 웹팀 최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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