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 어제와 오늘] 화폐교환 실패

워싱턴-박정우 parkj@rfa.org
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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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의 김일성 주석 생가를 형상화한 북한 타일. (2010년 8월)
만경대의 김일성 주석 생가를 형상화한 북한 타일. (2010년 8월)
/문성희 박사 제공

앵커: 언론인이자 학자로서 북한 문제, 특히 경제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뤄온 문성희 박사와 함께 짚어보는 ‘북한 경제, 어제와 오늘’ 시간입니다. 문성희 박사는 현재 일본 도쿄에서 시사 주간지, 슈칸 킨요비(주간 금요일) 기자로 한반도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고 2017년 도쿄대에서 북한 경제분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북한에 나타나고 있는 시장경제체제의 현황과 그 가능성을 짚어보고 개선돼야 할 점까지 중점적으로 살펴봅니다. 대담에 박정우 기자입니다.

문성희 박사
문성희 박사 (사진 제공:문성희)

<기자> 문성희 박사님, 북한에서 경제개혁과 후퇴를 되풀이해 온 문제에 대해 자세히 살펴봤으면 합니다. 북한에서 경제개혁정책이 실시된 것은 언제부터인지요?

문성희: 네, 1997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 총비서로 취임하고 1998년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됩니다. 이를 계기로 정식으로 김정일 정권이 시작되는데, 1998년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헌법도 개정되었습니다. 이 때 개정된 헌법은 경제개혁의 기반이 되는 항목들이 보충되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개인소유 규정의 확대(24조 3항), 경제관리에 있어서의 독립채산제의 실시와 ‘원가, 가격, 수익성’ 등의 개념 도입(33조 2항), 특수경제지대(경제특구)에서의 기업 창설∙운영의 장려 규정 보충(37조), 거주∙여행 자유의 규정 신설(75조) 등입니다. 그러니까 경제개혁의 시발점은 1998년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그렇군요. 이후 2000년 초부터 경제개혁이 시작됐다고 보시는 거군요.

문성희: 기자님도 아시다시피 북한에서는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경제난의 시기가 있었지요. 그 때 북한에서는 사실상 공급체계가 무너지고 농민시장이 매일같이 운영되게 되었고 암시장도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에 가격과 임금을 개정하는 조치를 취하고, 2003년에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한 것도 현실을 추가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처음 개혁은 그런 식으로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북한에서도 어쩔 수 없이 경제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보는데, 북한 주민들은 점차 그 시스템에 익숙하게 되었지요. 당시 얘기를 들은 주민들 사이에는 “과거에는 국가가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지요. 그것이 무너졌을 때 처음에는 어찌하면 좋을 지 몰랐지만, 나중에는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국가가 고마웠던가를 국가의 혜택을 안 받게 된 다음에야 알 게 되었지요”라는 말이에요.

<기자> 그러니까 현실을 인정한 것이 경제개혁의 시발이었다는 말이네요?

문성희: 네,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국가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가 계획경제를 그대로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한 뒤 개혁 조치를 취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경제개혁조치였지만 2005년 경부터 다시 후퇴하게 됩니다.

<기자> 구체적으로는 어떤 움직임이었던가요?

문성희: 북한 당국은 2005년 10월 1일자로 ‘양곡전매제’를 실시합니다, 양곡전매제란 국가가 식량전매권을 장악해서 구역마다의 식량 도매상점에서 쌀 등의 곡식을 국정가격으로 공급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식량공급제도의 정상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이 제도 아래서 곡물 판매는 정부가 독점하고 지역시장에서의 판매는 금지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 농민시장이 종합시장으로 개편됐을 때 시장에서는 쌀을 비롯한 곡물 판매도 허가되었습니다. 그런데 2005년부터는 시장에서는 다시 곡물을 팔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쌀 시장가격이 계속 올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002년 7월 1일 조치로 쌀 국정가격은 44원(약 0.26달러)으로 되었지만, 그 당시부터 시장에서는 800원부터 900원으로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쌀 국정가격을 정했는데도 결국 시장가격은 내려가지 않았어요. 국가에 바쳐지는 쌀이 결정적으로 부족하니까 아무리 국정가격을 싸게 정하더라도 시장가격은 내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기자> 그러니까 시장가격을 낮추기 위해 양곡전매제를 실시했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문성희: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종합시장, 나중에는 지역시장으로 명칭이 달라졌는데, 지역시장이 늘어나고 활성화함에 따라 북한 당국이 이에 위협을 느꼈다고 봅니다. 당국으로선 지역시장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없애야 할 존재였으니까요. 북한 당국이 두려워한 것은 시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달라지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시장을 없애기 위해서도 식량공급을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양곡전매제를 실시했다고 봅니다.

평양대동강건재공장 안에 붙어 있던 포스터. (2010년8월)
평양대동강건재공장 안에 붙어 있던 포스터. (2010년8월) /문성희 박사 제공

<기자> 양곡전매제의 실시를 전후해서 경제개혁이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보시나요?

문성희: 네, 2006년 4월에 부동산 전면조사, 2007년 초에 개인서비스업에 대한 실태조사가 각각 실시됐으며, 2007년 10월에는 지역시장이 통제됩니다. 2008년 10월에는 지역시장의 개장일수와 판매품목이 제한되고, 2009년 6월에는 지역시장의 면적축소 조치가 이뤄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역시장에 대한 통제가 조금씩 강화되는 가운데 2007년 4월에는 박봉주 당시 총리가 해임되었습니다. 박 총리는 아시다시피 2003년 9월에 총리에 취임한 이래 경제개혁을 지휘한 인물이었지요. 물론 지금은 복귀해서 김정은 위원장과도 매우 가깝지만 일시적으로는 관계가 경직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박 총리의 좌천은 개혁의 후퇴를 시사하는 움직임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양곡전매제의 실시로 식량이 잘 공급됐나요?

문성희: 그것이 잘 안 되었지요. 북한 당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바로 정체하였습니다. 쌀 가격도 계속 상승했어요, 저는 북한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정도 알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정기적으로 쌀의 시장가격을 조사해왔습니다. 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쌀 1킬로그램의 가격은 평양에서는 2007년 8월에 1천300원이었는데 2008년 8월에는 2천200원을 기록했어요. 1년 만에 1천원 가까이 오른 셈이지요. 지방도시의 함경남도 함주에서는 2008년 8월에 2천500원부터 2천700원의 가격을 붙였어요. 이건 평양보다도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기자> 외화로 환산하면 얼마인가요?

문성희: 당시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쓰기 위해서 일본 돈 5천엔을 북한 돈으로 교환하였더니 14만 7천원이었어요. 이것을 계산하면 1엔은 약 28원. 평양의 쌀 가격은 1킬로그램에 약 78엔, 함주의 쌀은 89엔부터 96엔입니다. 이것만 보면 북한에서 쌀 가격은 오히려 싸다고 할 수 있는데, 북한 사람들이 받는 노임이 3천원 정도라고 생각을 하면 쌀 시장가격은 엄청 비싼 것이지요. 한 달 노임으로 거의 쌀 1킬로그램밖에 구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기자> 그럼 양곡전매제도 실패했다는 것인가요?

문성희: 그래도 제가 방문할 때마다 평양에서는 공급이 사라지고 복귀하고 하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당국으로서는 양곡전매제의 실시를 지속하기는 했다고 보아야지요. 그렇지만 인플레이션은 좀처럼 억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 정부는 2009년 11월 30일, 갑자기 ‘화폐교환’(디노미네이션)을 실시했어요.

<기자> 예, 그 당시 화폐교환에 관해서는 여러모로 보도됐지요.

문성희: 그렇습니다. 1세대 당 10만 원을 상한으로 교환비율은 100대 1로 정했습니다. 부풀어 오른 화폐를 흡수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요.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의 리기성교수도 2010년 8월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필요이상의 화폐가 유통되고 있는 현상을 개선하고 국내 화폐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당국으로서는 통화를 절하하면 시장가격이 내려가고 그에 의해 공급시스템이 부활해 시장의 역할이 누그러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북한 화폐의 가치가 오르면 사람들이 임금의 범위내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 것 같아요.

<기자> 결국 화폐교환은 실패했지요.

문성희: 네, 그러니까 북한 일반주민들부터 맹렬하게 비판을 받았지 않습니까. 당시 항간에서는 박남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의 탓으로 화폐교환이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었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어요. 2010년 2월에는 당시 김영일 총리가 공적인 자리에서 사죄했다고 현지에서 들었습니다. 당국자가 인민 앞에서 사죄한다는 것 자체가 그 때까지 북한에서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지요. 그리고 그런게 아무리 재일동포라 해도 저같은 바같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이었어요. 그만큼 일반대중의 노여움이 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지난해 일본에서 첫 발간된 문성희 박사의 북한 경제에 관한 저서 ‘맥주와 대포동’ 한국어판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됐다.
지난해 일본에서 첫 발간된 문성희 박사의 북한 경제에 관한 저서 ‘맥주와 대포동’ 한국어판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됐다.
<기자> 노여움이 컸다고 하셨는데, 당시 현지에서 북한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문성희: 그거야 물가가 내려가기는커녕 점점 올라갔기 때문이에요. 쌀 시장가격을 실례로 든다면 화폐교환 이후인 2010년 8월에 평양에서는 1천원부터 1천500원 사이에 거래가 돼고 있었어요.

<기자> 가격이 별로 올라갔다고 느껴지지 않는데요?

문성희: 이것만 보면, 가격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화폐교환의 비율은 100대 1이기때문에 화폐교환 이전의 가격으로 환산하면 10만원부터 15만원이 됩니다. 2008년 8월과 비교하면 평양의 쌀 시장가격은 약 45배부터 68배로 상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쌀 가격을 기준으로 다른 상품 가격도 정해지니까 물가는 막 올랐지요. 그렇지만 급여는 그대로. 살기 어려운 사람이 늘어났지요. 그리고 한 세대 당 10만 원을 상한으로 그 이외의 돈은 무조건 몰수됐어요. 힘들게 모아 둔 비자금을 털린 것도 일반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심한 타격이었어요. 저축해 놓은 돈이 많을수록 피해가 컸습니다. 2010년에 만난 한 노동자는 “처음에는 대단히 기뻤다.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돈을 몰수해주니까. 물가도 내려가면 급여의 범위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후 곧바로 물가가 상승했습니다” 라고 한탄하고 있었어요.

<기자> 오늘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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