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미국행’ 탈북자 에블린 정 “미용사업이 꿈”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7.20
Evelyn_Jeong_b 올해 미 부시 센터의 ‘2020 북한자유장학생’으로 선정된 에블린 정(Evelyn Jeong) 씨.
/에블린 정 씨 제공

앵커: 올해 미국 부시센터 장학생으로 선정된 탈북민 에블린 정(Evelyn Jeong)씨는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라며, 꼭 성공해 개인미용사업을 하는게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미국에 정착해 새로운 사회에서 뚜벅뚜벅 자신의 꿈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순수한 어린 소녀의 발랄함과 함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온 강인함 역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덕인 기자가 에블린 정 씨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으로 2013년 북한을 탈북해 이듬해 만 15살의 어린 나이로 미국이란 낯선 땅에 홀로 발을 내디딘 에블린 정(21세) 씨(양).

모든게 새로운 미국이란 땅에 어린 나이에 정착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 온 그녀는 지금 미국 시카고주에 있는 아이엠(I.M) 미용전문 대학에서 미용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도착해 고등학교 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는 정 씨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 돼 누구의 억압 없이도 자신의 신념과 판단 아래 자유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미 부시 센터는 이런 그녀를 올해 북한자유장학금 수상자 12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습니다.

부시 센터의 린지 로이드 국장은 그녀의 탈북 과정과 미국에서 정착 과정이 심사위원에게 큰 감동을 줬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잘 이겨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최근 (17일) 자유아시아방송에 설명했습니다.

[린지 로이드 국장] 에블린 정 씨는 올해 장학생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사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북한을 탈출해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겨울에 강을 건넜고, 중국에 체류하다가 라오스, 태국을 거쳐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녀가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매우 독립적이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일하면서 학교도 다니는 학생입니다. 

에블린 정 씨는 최근(20일) 자유아시아방송에,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부시센터의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과 부시센터의 모든 직원에게 감사하단 말을 전했습니다.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던 그녀는 “이제는 숨기지 않고 나가기로 최근 결정했다”며, 자신의 이야기가 미국에 정착을 희망하는 탈북민들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길 희망한다고 자유아시아방송에 전했습니다.

기자: 에블린 씨,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부시센터 장학생으로 선정된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에블린 정: 이번이 두번째에요. 작년에는 코로나가 없어서, 부시 대통령 접견하고 사진도 같이 찍고, 올해도 같이 모이려고 했는데, 코로나 발생 이후로 그냥 줌(화상) 인터뷰만 부시 대통령과 하고 그랬습니다. 저는 일단 부시 대통령과 부시 센터 일하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일을 하곤 있지만, 학비를 감당하는 부분은 좀 어렵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채워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고, 말로밖에 표현을 못 하지만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서, 제가 지금 미용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꼭 미용 자격증을 딸 겁니다.

기자: 탈북 후 미국에 정착한 과정과 동기를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에블린 정: 저는 북한에서 저희 어머니랑 함께 나왔어요. 겨울에 새벽에 눈이 엄청 쌓이고 강이 얼었을 때, 그 강 위로 건너서 나왔거든요. 저희 어머니는 북한과 중국을 많이 오가시면서 무역을 많이 하셨어요, 합법적으로. 그러셔서 저희 어머니가 저랑 함께 중국을 넘은 다음에 저희 어머니가 중국에서 마무리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있고 그래서 저랑 함께 못 떠나게 되었어요. 저는 중국에 있을 이유도 없고 나이도 어리니깐, 하루빨리 가서 공부도 해야 하고 정착을 해야 하니, 저희 어머니가 제게 미국 가는 것을 추천을 해주셨어요. 저희 어머니도 그런 길을 따로 아시고 다 그러시니깐, 제가 어머니 이야기를 믿고 혼자 떠난 거예요. 태국까지의 긴 여정을 한달 내에 마치고, 태국 수용소에서 도착했을 때는 인터뷰가 진짜 많았어요. 그 인터뷰를 끝내고선 제가 당시 미성년자였으니깐 미국에 포스터케어(양부모집), 집에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정부 프로그램을 통해서, 저는 거기서 3년간 살다가 만 18세 되던 해에 성인으로 자유를 찾아서 나가게 됐어요.

기자: 에블린 씨가 태국에서 나오셨을 떄가 15살 정도 되셨었겠네요. 포스터케어 가정으로 오신후 성인이 되실 때까지는 계속 미국에 계셨었나요?

에블린 정: 저는 미국 내에서 나가본 적이 없어요. 제가 미국에 온 이후로부터 그 어느 나라도 나가본 적이 없어요.

기자: 그럼 미국에 들어오신건 정확히 언제신가요?

에블린 정: 네 제 입국 기록을 보면, 입국한 날짜는 11월 2014년이었어요. 그러니깐 13년 겨울에 어머님과 같이 넘은 거예요.

기자: 지금 에블린 씨 어머님은 어디에 계신거죠?

에블린 정: 저희 어머니는 지금 중국에서 몇 년 동안 계시다가 한국에서 한국 시민으로 살고 계세요.

기자: 그럼 어머님을 미국에 오신 뒤에 직접 뵈실 기회는 없었나요?

에블린 정: 네 제가 신분이 확실하지가 않아서요, 이번 3월 중순 때 시민권 인터뷰가 있었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다 닫고 그랬었잖아요. 그래서 인터뷰하는 곳에서 저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인터뷰 취소됐다고. 그래서 제가 언제쯤 되나 되물었더니 지금은 ‘자기네들도 모른다’ 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시민권을 획득하고 제가 한국에 안전하게 가려고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참 갈 길이 머네요…

기자: 미용을 전공으로 선택하시는 데 많은 고민을 하셨을 걸로 생각되는데요.

에블린 정: 조지아에서 고등학교 반학기 정도를 다녔었어요. 다니다가 시카고에 아는 분이 더 많이 생겨서 시카고로 이사왔어요.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이젠 미용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로 갔거든요. 고등학교 시카고에서 졸업할 때 제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까’ 그러면서, ‘내가 대학교 가는게 맞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고민 끝에 어쩔지 모르고, 그리고 친구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를 많이 가잖아요. 그래서 대학교를 가보자 하고 대학교를 한 반학기를 다녔었어요. 그런데 반학기를 다니는동안 솔직하게 얘기핳면 미국에서 살려면 돈이 좀 많이 필요하거든요. 사는 것, 먹는 것, 또 차가 있으면 차를 관리해야하고… 아무튼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들어가요. 장학금은 제가 난민지위로 와서 장학금을 받는다 해도 말이죠. 그리고 저는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고 있으니, 수입이 적으면 팹사(연방학자금보조)도 받을 수 있고 장학금도 문제는 없는데, 따로 필요한 것들이나 생필품같은 것이 많이 필요한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 대학교를 졸업해서 일을 행복하면 과연 행복할지도 많이 고민했고요, 저는 저의 선택을 따랐던 것 같아요. 미용에 제가 흥미가 많고, 또 재미있어요.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제가 미용을 선택한 것 같아요.

기자: 미용을 따로 선택하게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에블린 정: 저희 할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시고 북한에서 미술가셨어요. 미술도 하시고 가구도 만드시고 북한에서 그런걸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할아버지를 닮아서 미술 쪽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대학교에서도 제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이었어요. 엄청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미용 쪽으론는 눈썹 연장(eye lashing) 쪽으로 일하고 있고요, 또 3D 기술을 활용한 미용일도 배우면서 하고 있어요.

기자: 미국에 정착하신지 6년 정도 되셨는데,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에블린 정: 네. 언어의 장벽이 정말 컸습니다. 저는 처음 양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영어를 하나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부모님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단어를 조금씩 배워 나갔습니다. 또 미국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시면 제가 따라 읽으면서 발음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미국인 양부모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분이셨습니다.

기자: 미국인 친구는 많이 사귀셨나요?

에블린 정: 미국인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어요. 착한 친구들은 쉽게 다가와주고 대화할 수 있었지만,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수줍음이 많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원래 매우 활발한 사람인데, 우울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저는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많이 울었는데요.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많이 울었고요. 그때는 사춘기여서 마음과 심정의 변화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데 저는 유치원생 영어를 하니까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수업도 감당하기 힘들었고요. 대신에 저는 테니스를 치면서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기자: 지금도 미국에 오고 싶어하는 탈북민 분들, 탈북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요. 혹시이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에블린 정: 일단 영어인데요. 처음에는 자신이 영어를 잘 한다고 해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거든요. 영어를 잘하면 미국 생활에 도움이 되는데, 일단 영어 소통이 가장 어렵고요. 모든 것을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힘들지만, 이겨내면 괜찮은 것 같아요. 또 자기의 일은 스스로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자: 미국에서 생활하면 학비도 만만치 않고 생활비도 많이 들어갈 텐데, 계속 일하면서 공부하고 계신거죠?

에블린 정: 네, 물론 생활비는 항상 부족했고요. 지금도 시간제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또 여유가 있을 때마다 유튜브 방송을 만들며 지내고 있습니다.

기자: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에 인터넷 동영상 공유하는 유튜브 방송(북한 Evelyn, 링크)이나 인스타그램(@evelynjeong614)을 시작하셨는데,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에블린 정: 그동안 저에게 이런 기회가 많았습니다. 당시 중국에 계신 어머니에게도 여쭤봤지만, 북한에 있는 가족 때문에 위험하다고 반대하셨습니다. 이후 어머니가 한국에 정착하신지 1년이 지난 뒤 어머니가 허락하셔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는 유튜부 방송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행이나 미국 생활, 또 제가 북한에서 연예를 해봤기 때문에 북한의 연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고요.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다양하고 많은 것 같습니다.

기자: 에블린 씨가 앞으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요?

에블린 정:물론 꿈은 늘 바뀌지만, 제가 지금 미용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계속 미용을공부해서 언젠가 제가 운영하는 저의 사업체를 운영해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또 제가 조지 W.부시 대통령을 만나고 나니, 앞으로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기자: 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올해 미 부시센터가 선정한 ‘북한자유장학생’ 중 한 명인 에블린 정 씨로부터 탈북 이후 미국에 정착한 과정에 관해 들어봤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