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통신]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펴낸 김영순 씨 “요덕 수용소 실상 세상에 알려야죠”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는 사실은 청취자 분들도 잘 아시겠지요? 죄목도 모르고 재판도 없이 온 가족이 함께 수감되어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과 끝이 없는 강제노동으로 처절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북한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현장인 정치범 수용소. 오늘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 생활한 탈북자 김영순(72) 씨의 사연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울-이수경 xallsl@rfa.org
200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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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를 펴낸 김영순 씨가 자신의 저서를 들고 서있다.
RFA PHOTO-이수경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 출신으로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인 김영순 씨는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번째 부인 성혜림과 친구라는 이유로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수감됐습니다. 수용소에서 부모와 자식을 잃고 탈북자가 되어 지난 2003년 한국에 입국한 올해 72살의 김영순 씨는 요덕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 새해 1월 중순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라는 수기를 출간했습니다.

서울통신, 오늘은 김영순 씨와 얘기 나눠봅니다.

문: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수기를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답: 제 일대기에 가장 곤란한 시기인 30-40 대에 요덕 수용소에 가게 됐는데 그 곳에서 9년 동안 고충을 겪었기에 제가 반드시 대한민국에 가서 이런 것을 알리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는 세상을 향해 북한 김정일 체제가 얼마나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는지를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됐습니다.

문: 수기 제목이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입니다. 제목에 담겨있는 의미는?

답: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요덕에서 9년 동안 우리 가족이 고생하고 저는 혈육을 다 잃었습니다. 한편으로 성혜림을 모르고 요덕 수용소를 안 거쳤더라면 평양에서 북한이 좋은 줄 알고 여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혜림 덕에 대한민국 품에 안겨 말년에 인권 활동도 하고 마음껏 얘기할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

문: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 동거녀로 김정남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영순 씨가 아는 친구 성혜림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답: 성혜림은 마음이 착하고 여성적입니다. 전형적인 여자였습니다. 웃으면 양쪽 보조개가 들어가고 눈이 보이지 않아 귀여웠습니다. 생글생글 항상 웃는 얼굴로 제가 좋아하던 친구였습니다.

문: 성혜림은 김정일을 만날 당시 결혼을 한 상태이지 않았습니까?

답: 했지요.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평은 성혜림과 제가 평양예술학교 다닐 때 러시아 유학을 갔는데 화장품을 국제 우편으로 성혜림에게 선물할 정도로 따라 다녔습니다.

문: 당시 성혜림과 김정일의 관계를 모르셨나요?

답: 몰랐어요. 북한에서는 김정일에 관련된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67년에 잠깐 성혜림이 우리 집에 왔는데 5호 댁에 간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이평은 어떻하냐고 제가 물었는데 답변은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영영 보지 못했습니다.

문: 5호 댁에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셨나요?

답: 물론입니다. 북한에서 1호 가계라는 것은 김일성의 친인척을 말하고 5호 댁은 김일성 직계 가족, 부인과 자식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 북한에서는 과거 김정일이나 김일성 가계에 대한 얘기를 하면 정치범 수용소를 갈 정도로 큰 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답: 지금도 마찬기지 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도 테러로 죽었잖아요. 김정일 가계를 모두 폭로했으니까.

문: 당시 김정일의 여자 관계나 사생활에 대한 소문은 없었나요?

답: 거론하지 않아요. 개별적으로 친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얘기하죠. 북한은 정치 체계가 잘 꾸려진 나라입니다. 60년 동안 경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전 인민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체제가 북한입니다.

문: 요덕 수용소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매일 3시 반에 일어나서 15리 길을 건설 중대 본부까지 통강냉이 하나 물고 뛰어 다녔어요.

그 나날이 기가 막힙니다. 또 내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우리 부모가 죽었을 때, 거적 하나로 둘둘 말아서 시체를 묻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글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아들이 총살 당하고 하나 남은 아들이 두 번이나 북송 당하고 지금은 아파서 힘들어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북한 체제가 용서가 안됩니다. 정치범 수용소는 반드시 해체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김영순 씨는 처음 요덕 수용소에 수감됐을 때 죄목을 몰랐다고 하셨는데요, 성혜림 때문이었다는 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답: 1989년도에 평양에서 내려온 고위 간부가 나를 불러 말했습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가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것을 다시 말할 때에는 용서치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성혜림 때문에 요덕에 갔구나 확인했습니다.

문: 김영순 씨의 수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답: 한국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행복함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문: 앞으로 김영순 씨의 소망은?

답: 대한민국에 살아 있는 한 북한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제가 최승희 선생님의 제자이기에 대한민국에서 후세를 교육하고 싶은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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