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통신] 탈북자 지원가 최영훈 씨 “감옥도 모진 고문도 나를 멈추게 할 수 없어”
서울-이수경 xallsl@rfa.org
2009.01.02
2009.01.02
최 씨는 중국 옌타이 항에서 탈북자들의 해상 탈출을 돕다가
중국 감옥에서 3년 11개월을 보낸 건설 사업가입니다.
그는 지난 2006년 11월, 중국 감옥에서 풀려나 가족이 사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는 집에 가는 것이 절실한 바람이었지만
막상 귀국한 후 그는 정신적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왔을 때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다니고 힘들었어요. 제가 중국에 있었던 것이 10년입니다. 마치 서울의 강산을 몇 번을 바꾸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한국 분들을 만나면 제가 이상하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실제로 병원에 갔는데 정신 분열증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최 씨의 정신 이상 증세가 조금씩 나아진 것은 탈북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숨어 살면서 핍박을 받았던 탈북자들은 오히려 최 씨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굉장히 힘들어서 주변에 있는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정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당한 고통이 있기에 즉 북한을 탈출해서 보위부에 잡히고 중국에서 핍박을 받았던 상처가 있기에 저를 똑같이 대해줬습니다. 그분들과 가깝게 지내고 병원에 갔더니 정상이랍니다. 원래 2년은 사회생활을 못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최 씨는 1997년 건설 사업을 위해 중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탈북자의 존재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조선족인 줄 알고 채용했던 직원이 탈북자였고 그 직원을 통해 북한의 실상과 중국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알게 된 것이 본격적으로 탈북자들을 돕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합니다.
“탈출시키는 것은 몰랐어요 . 처음에는 신분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신분증이 있어도 중국에서 살지 못했어요. 그 다음에는 브로커를 샀어요. 그 다음에는 직접 한번 가보자고 했어요. 쿤밍까지 가서 탈북 경로를 돌면서 말입니다 . 그러면서 동북 3성, 연길, 용정 같은 곳도 가게 됐습니다. 그 후 북한을 왕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마치 마약 중독에 걸린 것처럼 탈북자 돕는 일에 빠져 들었어요.”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일이 죄가 되는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고 중국에서 도망다니는 불쌍한 동포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고향이 이북입니다. 명절이면 아버님이 돌아서서 우십니다. 우리 아버님을 비롯해서 이북 사람들이 굉장히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아껴서 고향 돌아가야지 늘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탈북자라고 해서 도운 것은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보다 탈북자들이 더 고통 속에 있고 핍박을 받고 있어서 그들을 도운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도왔을 것입니다.”
최영훈 씨는 한참 뒤에야 중국에서 탈북자를 도우면 범죄가 되고 평생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그 일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국경 경비는 점차 강화됐고 남한으로 가고싶어 하는 탈북자들은 늘어났습니다. 최 씨는 해상 탈출을 고안해 지난 2003년 80여 명의 탈북자들을 두 척의 배에 나눠 태우고 한국과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와 일본의 ‘북한난민구호기금’ 등 여러 국제 인권단체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출발지였던 옌타이 항에는 이미 중국 공안 100여명이 깔려 있었고 그는 탈북자들의 불법 월경을 도운 죄목으로 체포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함께 붙잡힌 탈북자 50여명은 강제 북송됐고 나머지 탈북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감옥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구치소에서 면회가 안됐어요. 가족의 소중함을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갇혀 있으니까 가족을 못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느끼면서 탈북자 형제들이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가족이 이렇게 중요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우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감옥에서 분투하는 동안 서울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의 삶도 힘겨웠습니다. 살림만 하던 아내는 봉제공장에 다니면서 두 딸을 키웠고 틈틈이 남편의 석방을 위해 시위대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 씨는 귀국 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을 도우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고 또 가족의 소중함도 깨달았습니다.
“감옥에서 3년 11개월. 잃은 것이 있다면 물질적인 재산이지만 그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다 없어졌지만 남은 것이 있습니다. 탈북자 형제들과 자매들을 만나면서 같이 웃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제 처에게도 예전에 물질이 있었을 때는 지금보다 더 못했어요. 집에 안들어갔어요. 돈으로 다 하려고 했어요. 4년이란 세월을 감옥에 있으면서 진짜 행복이란 무엇인가 생각했어요. 가족이 행복할 때 내가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지만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최영훈 씨.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인협회’에서 대외협력국장을 맡고 있는 그는 오늘도 회사 일을 마치고 협회 사무실로 달려와 탈북자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일로 분주합니다.
“한국에 왔을 때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병원에 다니고 힘들었어요. 제가 중국에 있었던 것이 10년입니다. 마치 서울의 강산을 몇 번을 바꾸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한국 분들을 만나면 제가 이상하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실제로 병원에 갔는데 정신 분열증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최 씨의 정신 이상 증세가 조금씩 나아진 것은 탈북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숨어 살면서 핍박을 받았던 탈북자들은 오히려 최 씨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굉장히 힘들어서 주변에 있는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정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당한 고통이 있기에 즉 북한을 탈출해서 보위부에 잡히고 중국에서 핍박을 받았던 상처가 있기에 저를 똑같이 대해줬습니다. 그분들과 가깝게 지내고 병원에 갔더니 정상이랍니다. 원래 2년은 사회생활을 못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최 씨는 1997년 건설 사업을 위해 중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탈북자의 존재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조선족인 줄 알고 채용했던 직원이 탈북자였고 그 직원을 통해 북한의 실상과 중국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알게 된 것이 본격적으로 탈북자들을 돕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합니다.
“탈출시키는 것은 몰랐어요 . 처음에는 신분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신분증이 있어도 중국에서 살지 못했어요. 그 다음에는 브로커를 샀어요. 그 다음에는 직접 한번 가보자고 했어요. 쿤밍까지 가서 탈북 경로를 돌면서 말입니다 . 그러면서 동북 3성, 연길, 용정 같은 곳도 가게 됐습니다. 그 후 북한을 왕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마치 마약 중독에 걸린 것처럼 탈북자 돕는 일에 빠져 들었어요.”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일이 죄가 되는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고 중국에서 도망다니는 불쌍한 동포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고향이 이북입니다. 명절이면 아버님이 돌아서서 우십니다. 우리 아버님을 비롯해서 이북 사람들이 굉장히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아껴서 고향 돌아가야지 늘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탈북자라고 해서 도운 것은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보다 탈북자들이 더 고통 속에 있고 핍박을 받고 있어서 그들을 도운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도왔을 것입니다.”
최영훈 씨는 한참 뒤에야 중국에서 탈북자를 도우면 범죄가 되고 평생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그 일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국경 경비는 점차 강화됐고 남한으로 가고싶어 하는 탈북자들은 늘어났습니다. 최 씨는 해상 탈출을 고안해 지난 2003년 80여 명의 탈북자들을 두 척의 배에 나눠 태우고 한국과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와 일본의 ‘북한난민구호기금’ 등 여러 국제 인권단체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출발지였던 옌타이 항에는 이미 중국 공안 100여명이 깔려 있었고 그는 탈북자들의 불법 월경을 도운 죄목으로 체포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함께 붙잡힌 탈북자 50여명은 강제 북송됐고 나머지 탈북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감옥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구치소에서 면회가 안됐어요. 가족의 소중함을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갇혀 있으니까 가족을 못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느끼면서 탈북자 형제들이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가족이 이렇게 중요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우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감옥에서 분투하는 동안 서울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의 삶도 힘겨웠습니다. 살림만 하던 아내는 봉제공장에 다니면서 두 딸을 키웠고 틈틈이 남편의 석방을 위해 시위대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 씨는 귀국 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을 도우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고 또 가족의 소중함도 깨달았습니다.
“감옥에서 3년 11개월. 잃은 것이 있다면 물질적인 재산이지만 그 재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다 없어졌지만 남은 것이 있습니다. 탈북자 형제들과 자매들을 만나면서 같이 웃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제 처에게도 예전에 물질이 있었을 때는 지금보다 더 못했어요. 집에 안들어갔어요. 돈으로 다 하려고 했어요. 4년이란 세월을 감옥에 있으면서 진짜 행복이란 무엇인가 생각했어요. 가족이 행복할 때 내가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지만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최영훈 씨.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인협회’에서 대외협력국장을 맡고 있는 그는 오늘도 회사 일을 마치고 협회 사무실로 달려와 탈북자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일로 분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