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산의 잘 사는 경제 이야기]종이-대물리는 교과서, 부수 줄인 노동신문

남쪽엔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공중 화장실에도 돌돌 말린 두루마기 휴지, 즉 위생지가 비치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과 80년대 초만 해도 화장실에서 위생지를 사용하는 것은 좀 사정이 넉넉한 집이나 가능한 일이었고, 신문지나 얇은 일력 종이를 구겨서 위생지 대신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불과 십년만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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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갑자기웬 화장실 얘기인가 하셨을텐데요.. 오늘은 잘 사는 경제 이야기 이 시간엔 휴지나 지폐 신문 등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종이와 종이 산업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탈북 방송인 김태산 씨가 전합니다.

한 나라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 경우엔 '돈, 즉 화폐'을 꼽겠습니다.

지폐를 보고 인쇄한 상태가 어떤지 또 어떤 종이를 썼는지를 잘 보면 그 나라의 경제 사정도 크게 틀리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 남조선의 화폐 종이의 질도 무척 좋습니다. 지갑을 딱히 가져다니지 않고 주머니에 그냥 넣어 다녀도 지폐가 심하게 구겨진다거나 찢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북쪽에서처럼 잘 찢어지는 지폐 때문에 밥풀이며 반창고를 동원해서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인 그런 지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남쪽엔 화폐를 찍는 공장에서 자체로 돈을 만드는 특수한 종이를 생산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에 수출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화폐,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교과서와 책,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신문지..각종 물건들의 포장지와 개인들이 위생실에서 쓰는 위생지까지.. 종이는 나라의 발전과 인간들의 문명한 생활을 조용히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남쪽의 지폐뿐 아니라 신문이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공책, 교과서에 등에 사용되는 종이를 보면 상당히 질이 좋습니다. 사실 펄프용 그러니까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목재나 원료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90여개가 넘는 종이 생산 공장이나 회사들에서 연간에 1,100만 톤 이상의 각종 종이를 생산해 세계적으로 종이 생산량에서 10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생산한 종이 중 300만 톤 이상을 해 마다 다른 나라들에 수출합니다.

이런 종이 생산을 위한 원료는 모두 수입에 의존해 기계펄프와 화학펄프를 일 년 동안 각각 240만 톤 정도씩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료를 수입해서 종이를 만드는 만큼, 값싼 일반 종이를 생산한다면 수출로 원료비 뽑기도 힘들었을 껍니다. 대신, 남쪽에서는 이런 원료에 고급 기술을 더하여 특수 고급 종이들을 생산, 수출함으로써 많은 외화의 이득을 창출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수입 원료를 가지고 가공해 수출하는 것은 종이뿐 아니라 대부분의 남쪽의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던 산업들의 특징이고, 이런 가공 산업은 중국과 기타 동남아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경제와 이런 종이 산업의 발달은 남조선을 종이가 풍족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한 달 정도 쓰고 버리는 공책이나 교과서들도 우리들이 북한에서는 보기조차 힘들었던 고급 종이들로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서는 참지라고 하는 우리민족의 전통 종이인 한지의 생산도 적극 장려해, 고급 참지들을 생산해 상점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팔리기도 하고 필요한 부문들에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상점들에 가면 각종 편지 봉투로부터 수 십 가지의 고급 공책들과 크고 작은 각종 수첩들, 그림종이와 색종이들, 팩스 종이를 비롯한 특수종이들을 볼 때마다 같은 조선 반도의 한 부분인 북쪽은 종이가 왜 그리도 부족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 봅니다.

물론 북조선에도 종이 생산 공업은 있지요. 신의주펄프, 길주펄프, 회령제지 만포제지 공장 등 적지 않은 종이생산 공업이 건설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직 국가가 원료자재와 동력을 대주어야 생산을 할 수 있는 국가계획의 일원화 체계의 경제 운영 방식은 북쪽의 모든 공장들을 멈추어 서게 하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신발 공장 옷 공장 치약 공장 사탕 공장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펄프공장과 제지공장들이 원자재 난과 동력 부족으로 가동을 멈췄던 시기, 종이의 부족으로 학생들의 교과서도 찍어낼 수 없었습니다. 평양시의 학교들에선 학생들이 쓰던 교과서를 회수해 몇 대를 내리물림 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이어가고 어린학생들이 공책이 없어서 연필로 쓴 것을 다시 지우고 써야 하는 비참한 현실까지 일어났습니다.

북쪽에서 유일한 당 기관지인 로동신문도 종이가 없어서 그 발행부수를 30% 이상이나 줄이고 그래도 모자라 신문을 그대로 회수하여 재생 이용 하는 형편입니다. 중앙기관의 사무원들도 사무용 종이가 없어서 업무에 적지 않은 장애를 느끼지요. 그나마 조금 나오는 종이마저도 표백을 못해 도무지 인쇄한 글을 알아 볼 수 없는 정도로 검은데도.. 그 검은 종이를 가지고 각 도들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은 종이를 구 할 수가 없어 방바닥에 장판도 못하기도 힘들고 벽도 바르지 못하고 살기 일쑵니다.

또 몇 년전 남쪽의 한 민간단체가 북한 학생들의 교과서를 만들라고 지원했던 종이를 가지고 노동신문을 찍어냈다는 얘기를 듣고 남쪽의 지원 단체는 물론 우리 탈북자들도 혀를 찼습니다.

자기나라 인민들을 문명한 사회에서 살게 해 준다고 요란하게 선전하는 공산주의자들이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자기 후대들에게 공책 한권도 제대로 만들어 주지 못하고, 인민들에게 위생지는 고사하고 장판지나 벽지하나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다. 그런 현상을 놓고도 세계 앞에서 아직도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선전할 수가 있을까요?

해방 후에는 이 남조선 보다 화학공업이 발전했던 북조선인데 지금은 왜 세계적으로 뒤떨어진 후진국이 되었는지를, 또 그 누구의 탓 아닌 자체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