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결산]① “통일 보다 가족 재회가 더 중요”
서울-노재완 xallsl@rfa.org
2009.09.30
2009.09.30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지난 2007년 10월에 열린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이후 약 1년 11개월 만에 재개됐습니다.
저희 RFA 자유아시아방송에서는 이번 상봉행사에 얽힌 이야기와 문제점을 오늘과 내일 이틀 연속으로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1차 상봉행사에 참가했던 남측의 김걸 씨가 북쪽 가족을 만난 얘깁니다.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동행, 취재했습니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80살의 김걸 씨는 이번 상봉에서 동생 4명을 만납니다.
기자가 김 씨가 살고 있는 서울 신림동 집에 찾아간 것은 지난 23일.
김 씨는 집안에서도 지팡이에 의존해 걸어야 할 정도로 다리가 많이 불편했지만, 동생들에게 가져다 줄 선물을 정성스레 꾸렸습니다.
김 씨가 준비한 선물은 대부분 생활용품. 얼핏 보아도 부피가 쌀 한가마니 정도 돼 보였습니다.
기자: 저기에 선물 뭐 샀습니다.
김걸: 양말, 속옷, 치약, 칫솔, 약품도 넣었습니다.
기자: 가지고 가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김걸: 차에다 싣고 갈 건데요. 2개로 갈라 묶어서 가면 좋은데.. 저거 차에 싣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김 씨가 가족과 헤어져 월남한 것은 1951년 11월입니다.
중국 인민군이 남하할 무렵 서울로 내려온 김 씨는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고향 용천에는 부모님을 비롯해 10남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생사가 확인된 사람은 5명.
김 씨는 막내 동생인 김책 얼굴만 생각이 나지 않을 뿐, 나머지 동생들의 얼굴이 가물가물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이번에) 모두 다섯 분이 나오시네요.
김걸: 5명이 나온다고 했는데, 5명이 나올 지, 4명이 나올지 그때 가봐야 압니다.
기자: 그러면 지금 살아계신 분이 5명입니까?
김걸: 아니, 6명인데, 한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기자: 아 그렇습니까.
김걸: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 가운데 막내 동생만 잘 생각이 나지 않지. 나머진 다 생각이 난다구.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와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단 하루도 고향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김 씨는 말했습니다.
김 씨는 이번에 대한적십자에서 상봉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서 눈물부터 났다고 했습니다.
김걸: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래 살다보니까 만나게 되는구나.. 동생들 만나면 얘기를 못할 것 같아요. 눈물이 나서요.
25일 오후 2시. 금강산에서 상봉할 이산가족들이 집결 장소인 속초 한화콘도에 속속 도착했고, 김 씨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그리운 가족들을 본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피곤한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자: 어르신 안녕하세요?
김걸: 어.. 안녕하세요. 오셨구만.
기자: 아드님 되십니까.
아들: 네. 그렇습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지난 2007년 10월에 열린 제16차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이후 약 1년 11개월 만에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한국 정부도 이번 상봉행사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날 숙소에 마련된 등록 접수처에는 유종하 대한적십자 총재도 나와 일일이 이산가족들을 맞이했습니다.
적십자 직원: 적십자 총재님이십니다.
이산가족들: 총재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적십자 직원: 아시겠지만, 유일한 국군포로 한 분이 계십니다. 형제간입니다.
유종하: 생사를 이전에 좀 알았습니까? 아니면 이번에 처음 아셨습니까?
이산가족: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유종하: 형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국군포로 상봉자: 79살입니다.
유종하: 아. 예. 다행이네요.
이산가족 상봉자 등록을 마친 김 씨는 곧바로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혈압이 높게 나왔다”는 의료 담당자의 말에 김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혈압 때문에 행여나 금강산에 못 가게 될까봐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의료 담당자: 어르신, 혈압이 살짝 높아요.
김걸: 얼마 나왔는데요?
의료 담당자: 180이요.
김걸: 180은 말도 안돼.
의료 담당자: 다시 측정해볼 건데요.
김걸: 아니, 지금 막 와서 그래..
접수처 근처에는 간이 환전소도 설치돼 있었습니다. 금강산에 가서 북쪽 가족들에게 건네 줄 돈을 달러로 바꾸기 위해섭니다.
기자: 대체로 어르신들 환전 얼마나 합니까?
직원: 보통 500불 정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이번에 어떤 제약이 있나요?
직원: 통일부에서 정확한 얘기는 듣지 못했고요. 이따가 교육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자: 가셔서 금강산에서 쓰실 돈이랑 또 가셔서 가족들에게 줄 돈. 그런 거죠?
직원: 네. 그렇죠.
이날 오후 4시에는 이산가족들의 방북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자들은 방북교육에 앞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방북교육 진행자: 잠시 후 정각 4시에 방북 안내 설명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를 잠시 정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날 방북교육 시간에는 현인택 장관도 참석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히고, 이산가족들에게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현인택: 정부로서는 이산가족 문제를 남북간의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북한의 비협조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간 진행돼 오던 상봉행사도 당분간 중단 되었고,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께서 상심이 매우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오늘 이런 자리에 모시기 돼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방북교육은 이날 오후 6시까지 진행됐으며, 이산가족들은 교육이 끝난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다음날 일정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김 씨는 이른 아침부터 함께 묵었던 다른 이산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가져온 짐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김 씨는 지난 세월의 그리움과 평생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김걸: 잠이 안 왔습니다. (억지로) 한 12시 정도에 잤나.. 그런데 여기 있는 분들은 잘 자더라고요. 나만 못잤어요.
오전 9시가 되자 이산가족들은 숙소 앞으로 나와 준비된 버스에 탑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는 속초를 출발해 남북출입사무소가 있는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출발한지 40분이 됐을까. 이산가족을 태운 버스들은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했고 남북출입사무소에서는 적십자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이 대형 현수막을 걸고 이산가족들을 맞이했습니다.
김 씨는 인사하는 자원봉사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어린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했습니다.
김걸: 바이 바이, 오케이 오케이~~
이산가족들은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간단히 출경 절차를 마친 뒤, 현대아산측에서 마련한 금강산행 버스에 다시 탑승했습니다.
기자: 잘 다녀오십시오.
김걸: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금강산으로 향하는 이산가족들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녘의 하늘만을 쳐다봤습니다.
이산가족들은 이날 오후 1시쯤 금강산 외금강호텔에 도착해 오후 3시경에 단체상봉을 시작으로 2박 3일간 금강산에 머물며 이산의 한을 달래고 상봉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상봉 기간 남북의 가족들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재회했습니다.
꿈같은 시간도 잠시,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해야만 했습니다.
이산가족: “(흐느껴 울음) 아이고, 아이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
남측 방문단은 28일 금강산호텔에서 북측 가족과의 작별 상봉을 끝으로 귀환했습니다.
29일 오전. 기자는 다시 김 씨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김 씨는 다소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가족 만난 얘기를 자세히 해주었습니다.
김걸: 난 (얼굴을) 모르겠더라고요. 셋째 동생정도만 알겠고. 그런데 동생들은 어떻게 절 알아보더라고요. 나 보더니 알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작별 상봉 때 맘이 너무 아팠다는 김 씨는 헤어질 때 동생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간단한 인사말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김걸: 들어가서 잘 살아라. 너희도 잘 살고, 나도 잘 살테니까. 너희가 잘 사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참 기쁘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현실적으로 죽기 전에 남북한이 통일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하지만 가족상봉 만큼은 남북 당국이 합의해 면회소를 이용해 마음대로 만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걸: 평화통일 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사람들이 맘대로 왔다 갔다 했으면 좋겠다고 남쪽 당국자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김 씨는 회견을 시작할 때만 해도 환한 표정을 지었지만, 얘기를 나누고 시간이 흐르면서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너무도 짧기만 했던 사흘간의 일정이 야속한 듯 김 씨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희 RFA 자유아시아방송에서는 이번 상봉행사에 얽힌 이야기와 문제점을 오늘과 내일 이틀 연속으로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1차 상봉행사에 참가했던 남측의 김걸 씨가 북쪽 가족을 만난 얘깁니다.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동행, 취재했습니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80살의 김걸 씨는 이번 상봉에서 동생 4명을 만납니다.
기자가 김 씨가 살고 있는 서울 신림동 집에 찾아간 것은 지난 23일.
김 씨는 집안에서도 지팡이에 의존해 걸어야 할 정도로 다리가 많이 불편했지만, 동생들에게 가져다 줄 선물을 정성스레 꾸렸습니다.
김 씨가 준비한 선물은 대부분 생활용품. 얼핏 보아도 부피가 쌀 한가마니 정도 돼 보였습니다.
기자: 저기에 선물 뭐 샀습니다.
김걸: 양말, 속옷, 치약, 칫솔, 약품도 넣었습니다.
기자: 가지고 가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김걸: 차에다 싣고 갈 건데요. 2개로 갈라 묶어서 가면 좋은데.. 저거 차에 싣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김 씨가 가족과 헤어져 월남한 것은 1951년 11월입니다.
중국 인민군이 남하할 무렵 서울로 내려온 김 씨는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고향 용천에는 부모님을 비롯해 10남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생사가 확인된 사람은 5명.
김 씨는 막내 동생인 김책 얼굴만 생각이 나지 않을 뿐, 나머지 동생들의 얼굴이 가물가물 기억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이번에) 모두 다섯 분이 나오시네요.
김걸: 5명이 나온다고 했는데, 5명이 나올 지, 4명이 나올지 그때 가봐야 압니다.
기자: 그러면 지금 살아계신 분이 5명입니까?
김걸: 아니, 6명인데, 한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기자: 아 그렇습니까.
김걸: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 가운데 막내 동생만 잘 생각이 나지 않지. 나머진 다 생각이 난다구.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와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단 하루도 고향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김 씨는 말했습니다.
김 씨는 이번에 대한적십자에서 상봉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서 눈물부터 났다고 했습니다.
김걸: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래 살다보니까 만나게 되는구나.. 동생들 만나면 얘기를 못할 것 같아요. 눈물이 나서요.
25일 오후 2시. 금강산에서 상봉할 이산가족들이 집결 장소인 속초 한화콘도에 속속 도착했고, 김 씨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그리운 가족들을 본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피곤한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자: 어르신 안녕하세요?
김걸: 어.. 안녕하세요. 오셨구만.
기자: 아드님 되십니까.
아들: 네. 그렇습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지난 2007년 10월에 열린 제16차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이후 약 1년 11개월 만에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한국 정부도 이번 상봉행사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날 숙소에 마련된 등록 접수처에는 유종하 대한적십자 총재도 나와 일일이 이산가족들을 맞이했습니다.
적십자 직원: 적십자 총재님이십니다.
이산가족들: 총재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적십자 직원: 아시겠지만, 유일한 국군포로 한 분이 계십니다. 형제간입니다.
유종하: 생사를 이전에 좀 알았습니까? 아니면 이번에 처음 아셨습니까?
이산가족: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유종하: 형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국군포로 상봉자: 79살입니다.
유종하: 아. 예. 다행이네요.
이산가족 상봉자 등록을 마친 김 씨는 곧바로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혈압이 높게 나왔다”는 의료 담당자의 말에 김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혈압 때문에 행여나 금강산에 못 가게 될까봐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의료 담당자: 어르신, 혈압이 살짝 높아요.
김걸: 얼마 나왔는데요?
의료 담당자: 180이요.
김걸: 180은 말도 안돼.
의료 담당자: 다시 측정해볼 건데요.
김걸: 아니, 지금 막 와서 그래..
접수처 근처에는 간이 환전소도 설치돼 있었습니다. 금강산에 가서 북쪽 가족들에게 건네 줄 돈을 달러로 바꾸기 위해섭니다.
기자: 대체로 어르신들 환전 얼마나 합니까?
직원: 보통 500불 정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이번에 어떤 제약이 있나요?
직원: 통일부에서 정확한 얘기는 듣지 못했고요. 이따가 교육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자: 가셔서 금강산에서 쓰실 돈이랑 또 가셔서 가족들에게 줄 돈. 그런 거죠?
직원: 네. 그렇죠.
이날 오후 4시에는 이산가족들의 방북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자들은 방북교육에 앞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방북교육 진행자: 잠시 후 정각 4시에 방북 안내 설명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를 잠시 정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날 방북교육 시간에는 현인택 장관도 참석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히고, 이산가족들에게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현인택: 정부로서는 이산가족 문제를 남북간의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북한의 비협조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간 진행돼 오던 상봉행사도 당분간 중단 되었고,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께서 상심이 매우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오늘 이런 자리에 모시기 돼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방북교육은 이날 오후 6시까지 진행됐으며, 이산가족들은 교육이 끝난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다음날 일정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김 씨는 이른 아침부터 함께 묵었던 다른 이산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가져온 짐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김 씨는 지난 세월의 그리움과 평생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김걸: 잠이 안 왔습니다. (억지로) 한 12시 정도에 잤나.. 그런데 여기 있는 분들은 잘 자더라고요. 나만 못잤어요.
오전 9시가 되자 이산가족들은 숙소 앞으로 나와 준비된 버스에 탑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는 속초를 출발해 남북출입사무소가 있는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출발한지 40분이 됐을까. 이산가족을 태운 버스들은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했고 남북출입사무소에서는 적십자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이 대형 현수막을 걸고 이산가족들을 맞이했습니다.
김 씨는 인사하는 자원봉사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어린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했습니다.
김걸: 바이 바이, 오케이 오케이~~
이산가족들은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간단히 출경 절차를 마친 뒤, 현대아산측에서 마련한 금강산행 버스에 다시 탑승했습니다.
기자: 잘 다녀오십시오.
김걸: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금강산으로 향하는 이산가족들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녘의 하늘만을 쳐다봤습니다.
이산가족들은 이날 오후 1시쯤 금강산 외금강호텔에 도착해 오후 3시경에 단체상봉을 시작으로 2박 3일간 금강산에 머물며 이산의 한을 달래고 상봉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상봉 기간 남북의 가족들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재회했습니다.
꿈같은 시간도 잠시,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해야만 했습니다.
이산가족: “(흐느껴 울음) 아이고, 아이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
남측 방문단은 28일 금강산호텔에서 북측 가족과의 작별 상봉을 끝으로 귀환했습니다.
29일 오전. 기자는 다시 김 씨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김 씨는 다소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가족 만난 얘기를 자세히 해주었습니다.
김걸: 난 (얼굴을) 모르겠더라고요. 셋째 동생정도만 알겠고. 그런데 동생들은 어떻게 절 알아보더라고요. 나 보더니 알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작별 상봉 때 맘이 너무 아팠다는 김 씨는 헤어질 때 동생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간단한 인사말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김걸: 들어가서 잘 살아라. 너희도 잘 살고, 나도 잘 살테니까. 너희가 잘 사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참 기쁘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현실적으로 죽기 전에 남북한이 통일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하지만 가족상봉 만큼은 남북 당국이 합의해 면회소를 이용해 마음대로 만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걸: 평화통일 되는 것도 좋지만, 우선 사람들이 맘대로 왔다 갔다 했으면 좋겠다고 남쪽 당국자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김 씨는 회견을 시작할 때만 해도 환한 표정을 지었지만, 얘기를 나누고 시간이 흐르면서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너무도 짧기만 했던 사흘간의 일정이 야속한 듯 김 씨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