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개방 23년, 베트남을 가다] 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로 “미국과 손잡은 후 눈부시게 성장”

“ We love Clinton” 우리는 클린턴 대통령을 사랑해요! 아직도 기자의 귓가를 맴도는 말입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도착하면 꼭 가보고 싶었던 호아로 수용소. 베트남을 식민지 지배하던 프랑스 정부가 베트남 인민군의 포로 수용소로 만든 곳입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이 터진 1964년 부터 1973년 까지는 미군 전쟁 포로들이 갇혔습니다.
베트남-정아름 junga@rfa.org
2009.08.26
letter_305 베트남 미국 간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당시 미 하원 동아태소위 스테판 솔라즈 위원장이 부이 키엔 딴 회장에게 보낸 서한.
RFA PHOTO/ 정아름
베트남 독립 운동가가 투옥돼 있던 독방이 보이고, 단두대를 비롯한 고문 처형 기구가 전시돼있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전해집니다 . 방에는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 듯 적막이 흐르고,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수용소의 한 전시실에는 뜻밖의 사진들이 걸려있습니다. 미국과 국교 정상화 후 첫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던 더글라스 피터슨 (Douglous Peterson)과 200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와 대선 후보로 경쟁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사진입니다. 모두 베트남 전쟁 시 이곳에 갇혔던 당시의 사진이라는 설명. 기자는 호아로 수용소에서 안내를 해주던 쭝 씨에게 묻습니다.

기자: 베트남 사람들이 느끼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 대체 어떤 걸까요?

쭝:
민감한 문제지요. 하지만 미국인과 우린 친굽니다. 많은 베트남인은 미국과 프랑스 두 나라 모두 궁극적으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빌 클린턴 전대통령을 사랑합니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 간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죠.

전시실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유럽 등지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는 서양인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작년에 수용소를 재방문한 사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수교 수립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쭝: 미국의 어머니들도 슬펐을거라 생각해요. 그들의 아들들이 베트남 전에 서 사투를 벌여야 했을테니까요.

이런 교과서적인 대답이 정말일까 싶어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하지만 30대 초반 밖에 되지 않은 쭝 씨는 거침이 없습니다.

쭝: 우리는 미국인과 친구에요. 지금 제 방친구도 미국인인걸요. 저랑 같이 살고 있어요. 제가 태국에서 한 달동안 그 친구랑 지냈는데 지금은 베트남에 영어를 가르치러 왔길래 우리 집에 그냥 묵으라고 해서 같이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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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국교 수립 당시 베트남을 방문한 사진이 호아로 수용소의 한 전시실에 걸려있다. RFA PHOTO/ 정아름


쭝 씨는 대뜸, 한술 더떠 기자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없냐고 묻습니다.

쭝: 베트남 사람들은 영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죠. 미국 같은 나라에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고 싶어서죠. 아마 절 도와 줄 수 있을지 몰라요 그죠? 하하

어안이 벙벙합니다. 같은 날 오후. 도이모이 라는 개혁 개방 정책을 도입할 당시 베트남 정부에서 고문 (adviser)을 맡았던 부이 키엔 딴 회장을 만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립니다. 딴 회장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특사로도 활동했습니다. 딴 회장입니다.

딴: 1979년 베트남 정부가 프랑스에 있던 저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경제개혁을 하려고 하는 데 도와 달라고…. 당시 문제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모든 기업과 기관은 베트남 정부에 의해 통제돼있었죠. 사기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딴 회장이 베트남 공산정권에 첫번째로 주문한 것은 국영 기업체제를 허물고, 사기업들을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딴: 듣고 있던 공산당 간부가 그러더군요. 당신 말이 백번 맞지만, 그 내용을 가지고 자기가 당 지도부에 가면 아마 해고당할 거라구요. 하지만 결국 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갔어요.

경제 개혁을 위한 자문을 구하려 딴 회장에게 연락했던 베트남 공산정권은 당황스럽기만 한 회장의 제안을 결국 받아 들입니다.

딴: 어렵다고 하길래 방법이 있냐고 물으니 없다고 답하더라고요….현재 베트남에는 36만 7천개의 사기업이 존재합니다. 이 기업들은 베트남 GNP 의 절반 이상 생산해내고 있고요.

도이 모이 개혁 개방의 배경에는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것은 취하는 베트남인의 실리주의가 있었습니다. 1986년 도이모이 개혁 개방 정책 이후, 세계의 자본을 끌어 들이기 위해 베트남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였습니다. 딴 회장이 1991년 비밀 특사로 미국에 갔을 때, 국무부 관리를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원한 것은 의외의 사항들이었습니다.

딴: 미국 관리가 말하더군요. 베트남이 캄보디아 의 크메루즈에서 손을 떼길 원한다. … 베트남은 이후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습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확실한 신뢰였습니다. 베트남은 그걸 증명해 보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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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 위치한 호아로 수용소. 프랑스 식민지 시절 만들어져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수용됐던 곳. RFA PHOTO/ 정아름


전쟁으로,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라는 다른 이념으로 등진 베트남과 미국은 베트남의 외교적 결단으로 신뢰를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완전히 철수하면서 말입니다. 이에 미국은 적대관계 청산을 위한 협상의 개시와 경제 제재 완화, 연락 사무소 개설과 국교수립 등 네 단계의 구상을 제시했습니다. 딴 회장입니다.

딴: 지난 91년 베트남은 미군포로와 실종자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필요한 조치를 취했죠. 그리고 바로 지난 95년 양국의 수도에 연락사무소가 개설되고 7개월 후 외교관계의 수립과 함께 대사관 설치로 양국관계는 정상화됐습니다.

딴 회장은 북한이 베트남 보다 더 빨리 그리고 쉽게 개혁 개방을 이루고,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끌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자신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로 가버려 베트남 정부의 변화에 동참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북한은 남한인들이 있기에 상황이 훨씬 좋다고 말합니다.

딴: 전세계에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한 남한 경제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북한을 도울 수 있습니다. 더 좋은 환경이죠. 남한과 북한이 훨씬 더 큰 개방, 그리고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북한과 남한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손을 맞잡을 지 고민하고 결정한다면, 그 후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차소리>

한국의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양무진 교수는 북한이 베트남처럼 문을 열지 않는다면 북한이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양무진: 미 북 간에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에 단계적인 이행과 검증을 통해 신뢰를 증진시켜야 합니다. 북한이 관계 정상화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조금씩이라도 보인다면 정상화는 가능합니다.

베트남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문을 열고, 또다른 도약을 위해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 내기 까지. 이를 토대로 세계무역기구 (WTO)에 가입해 세계 각국의 외국 자본을 대거 끌어들이기 까지. 실리주의를 바탕으로 베트남이 이룬 외교적 정책적 결단들은 23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베트남의 개방과 경제 발전에 따라온 베트남 인들의 인식의 변화는 가히 놀랍습니다. 호아로 수용소를 안내해줬던 쭝 씹니다.

쭝: 아직 베트남에서는 대학교 까지 ‘사회주의’ (막시즘) 를 배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그리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베트남인이 ‘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를 생각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국가를 더 발전시킬까 생각한다는 겁니다.

어제의 적, 오늘의 친구. 베트남 친구가 말한 “We love Clinton”(우리는 클린턴을 사랑해요)는 더 이상 외교적 수사가 아닌 듯합니다.

베트남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아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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