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인생 탈북자 “지금은 행복합니다”

2008-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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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노정민 xallsl@rfa.org

국군포로인 아버지로 인해 겪은 차별과 가난, 고난의 행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아들과 남편 그리고 인신매매의 고통까지 겪은 파란만장의 인생의 탈북자가 남한에 정착해 결혼도 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했을 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여성 탈북자 김화실씨를 서울통신에서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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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 견학 중인 탈북 어린이들 - PHOTO courtesy of 공릉종합사회복지관

2004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김화실씨 남한 서울에서 만난 김화실씨는 다소 여윈 모습이었지만 얼굴표정은 너무나도 밝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국군포로의 딸이라는 신분 때문에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난 때문에 눈앞에서 남편과 아들이 굶어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심지어 중국인에게 팔려가는 아픈 과거가 있었지만 김화실씨는 현재 남한에서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픈 과거 대신 현실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김화실씨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김화실: 우리 아버지가 여기 사람이에요, 50년 전쟁 때 국군포로가 돼서 못 넘어 오셨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충청북도 보원군 장신리란 곳에 있었어요.

김화실씨의 아버지는 남한 출신의 국군포로. 강원도 출신의 어머니는 한국 전쟁 때 북한으로 혼자 피난을 갔습니다. 그렇게 북한에서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김화실씨는 형제도, 친척도 없이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꿈도 많고 재주도 많았던 김화실씨는 선전부, 방송국에서 활동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을 보였지만 국군포로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을 받는 등 슬픈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김화실: 여기서 국군포로라면 말이라도 예쁘죠. 저쪽은 괴로군 43호라고 딱 찍어 붙였어요. 사람들이 나쁘게 보고 저도 천대 많이 받았죠. 가고 깊은데 다 못하고 부모를 막 원망하고 울기도 하고 그랬죠.

1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늘 국군포로라는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매일 탄광에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보다도 딸에게 고통만 준 것을 너무나 가슴아파했다는 아버지는 눈을 감는 순간에도 눈물만 흘렸다고 화실씨는 회상합니다.

김화실: 저희 아버지가 95년도에 돌아가셨어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때는 이해 못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알아요, 눈 딱 뜬 상태에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아버지는 탄광, 아오지 탄광에 떨어져서..갇힌 생활이죠. 뭐 아버지도 처나 자식에게 이름도 다 틀리게 대주고, 살아온 경력도 다 틀렸어요.

그리고 북한에서 시작한 결혼생활.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북한에 닥친 지독한 식량난, 고난의 행군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남편과 아들 하나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되고, 할머니마저도 굶어 죽었습니다. 그렇게 자식과 남편을 떠나보내고 슬픔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화실씨는 중국에서 일하면 한 달에 중국 돈 500원 정도를 벌 수 있다는 조선족 남성의 꾐에 빠져 따라나섰다가 중국인에게 단돈 11000원에 팔리는 신세가 됩니다.

김화실: 조선족 애가 한족에게 팔아먹었어요. 우리들을. 우린 일할 수 없대요, 말을 못해서 그래서 시집가야 된다. 우리가 여자가 9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집을 안가겠다 해죠. 그런데 우리를 팔아먹었죠. 몰랐어요. 저는..나를 중국 돈으로 8천원에 샀대요. 경찰한테는 3000원 주고. 다해서 11000원.

가난한 농촌 중국인에게 팔려간 화실씨는 중노동과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좀처럼 살림은 펴질 않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딸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형편이 어려워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 화실씨는 남한으로 가면 한국국적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고 목숨을 건 도전 끝에 몽골을 거쳐 2004년 남한에 입국하게 됩니다.

김화실: 대한민국에 딱 내려가지고, 봉고차에 탄 우리 10명이 몽땅 다 울었어요. 그렇게 오고 싶었던 대한민국이고, 이 땅에 와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다 울더라구요.

남한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한 일은 아버지의 가족을 찾는 일. 국군포로였던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로 내려가 수소문을 하고 유전자 검사까지 한 끝에 삼촌 등 가족을 찾았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을 때 통일이 되면 고향에 꼭 가보라는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동안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왔던 화실씨는 남한에서 가족도 찾고, 남한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중국에서 데려온 딸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 와 처음에는 말도 잘 안통하고, 상대방이 말한 것을 이해도 잘 못하고 사람을 만나도 인사조차 잘 못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편과 가정, 아이...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존재에 늘 감사하며 또 북한에서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자유와 풍요로운 생활에 감사하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3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어 왔던 탈북자 김화실씨 이제는 행복한 일들만이 가득할 것이라며 대한민국에 감사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김화실: 여기 와서 보니까 대한민국이 정말 잘해줘요. 탈북자들이 여기서 정착하기 힘들고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북한에서 사는 것 보면 먹을 것부터...좋은 옷 입고 고기 먹기 싫어 안 먹고 이런 것이 행복이지 뭐가 행복이에요. 여기서 이 행복이...어디서 이런 것을 해줘요.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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