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보내는 편지 - 납북자 윤무출씨의 아들 윤원천씨의 사연 (2)

200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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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사는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과 이들이 북한에 끌려간 가족들에게 보내는 ‘북으로 보내는 편지’를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열 번째 순서로 지난 1968년 고기잡이를 하다 납북된 윤무출씨의 아들 윤원천씨의 사연을 지난주에 이어 계속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종진호 선원 윤무출씨의 아들 윤원천씨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도 대진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저희 오남매가 서울에서 잘 해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약력이 나올 때 부터 눈물을 보이시고 잔치가 끝날 때 까지 우셔서 손님들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습니다. 서울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죽을 때 까지 아버지를 기다려야 한다며 아버지가 계셨던 그 자리 그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잠자리를 보고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38살에 아버지와 헤어지신 어머니가 헤쳐나가시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불상하고 대단해 보입니다. 아버지 건강하십시오. 꼭 만나 뵈야죠... 저와 어머님은 항상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다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1968년 고기잡이를 나갔다 북한경비정에 의해 납북된 윤무출씨. 당시 윤씨의 가족들과 동내 사람들은 윤씨가 탄 종진호가 기관고장으로 바다에서 표류를 하는 줄 알고 윤씨를 찾으러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고 그때 6살 이였던 윤씨의 차남 윤원천씨는 기억합니다.

윤원천씨 기억속의 아버지는 동내에서 고기를 제일 많이 잡아와 가족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했던 자랑스러운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납북 사실이 알려지면서 윤씨 가족들의 인생은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납북 피해자 가족이라는 오명으로 남한정부는 윤씨 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대했고, 윤원천씨의 누나와 형은 제대로 된 직장 한번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은 윤무출씨의 부인 최옥자 씨입니다.

최옥자씨에게 더 큰 아픔은 남편을 잃은 슬픔 보다는 남편이 납북을 당했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더 괴로워하고 있다고 아들 윤원천씨는 말합니다.

윤원천: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보다 우리들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해 더 큰 한이 맺혀서 아버지보다는 그런 부분에 대해 더 화가 나아 계시다.

올해 74살이 된 최옥자씨는 종종 남편 생각을 하면서 슬픔을 토해 내기도 한다고 윤원천씨는 말합니다.

윤원천: 원망을 한다. 왜 배를 타지 말라고 했는데 배를 탔느냐. 배를 안탔으면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아무런 탈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최옥자씨는 30여년 전 남편이 떠난 그 집에서 아직도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윤씨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윤원천: 어머니가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다. 적십자에서는 답이 없다. 떨어졌다는 것만 알고 있다.

윤씨 가족들은 더 이상 남한 정부가 윤무출씨를 송환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저버렸습니다.

윤원천: 기대도 안한다. 정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고 납북자 가족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정부는 모른다.

최근 몇몇 납북 피해자들이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해 가족들과 상봉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주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와 상봉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윤원천: 친구가 한번은 그런 얘기를 했다. 그는 목회자 인데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또 우리 직원도 중국에 아는 사람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1%만 되도 시도를 해보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희망을 걸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지난 1968년 납북된 종진호 선원 윤무출씨의 아들 윤천씨의 편지였습니다.

이규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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