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준비하면 성공한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8.10
construction_trucks-620.jpg 충남 보령시 공설운동장 주차장의 건설 중장비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치밀한 계획과 준비 과정을 통해 현재 위치에 서게 됐는가를 알게 됩니다. 남한생활 5년동안 자신의 미래에 투자하고 빠른 결정을 통해 지금은 서울에서 건설 중장비 업체를 운영하는 탈북민에게 성공적인 남한사회 정착에 대해 들어봅니다.

2010년에 남한에 간 탈북여성 이미애(가명)씨는2014년 가을에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 전에는 직업훈련학교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는데요. 그가 했던 일을 탈북민 취업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이미애: 약정계약이라고 직업훈련 졸업 후 취업을 보장해야지 교육을 시킬 수가 있어요. 그런 과정에 거래 업체 사장들을 많이 만났죠. 한국의 2만개 직업 중에서 내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를 따져봤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나중에는 20개로 줄었는데 그 업체들을 다 가봤어요. 그리고 국세청 재무재표 자료도 다 확인하고요. 저도 40대 초반에 왔는데 짧은 기간에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한거죠. 당시 하고 싶은 직업이 20개정도 됐는데 다 공부를 했죠. 그리고 5년만에 다니던 직장을 정리를 하고 본격적으로 현장 조사를 하고 바로 사업을 시작한거죠.

자신도 탈북민으로 남한사회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에 빨리 경제적 자립을 하길 원했고 비록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들 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용감하게 도전한다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미애: 내가 이땅에서 탈북민들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탈북민 정착에 도움을 주는 것이 기술 배워주는 거죠. 파워 크레인은 고연봉이예요. 한 3년만 하면 700만원 받으니까. 한 사람을 키워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주변 사람들을 말을 귀담아 듣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에나 현혹이 돼서 갈팡질팡 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힘이고 탈북민이 남한에 뿌릴 내리기 위해선 전문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애: 현재 눈 앞에서 이 사람이 어느만큼 성실하게 노력하는 가를 보는 겁니다. 자기 과거를 다 내려놓고 자기가 완전하게 정착한다는 것이 한마디로 말하면 취업입니다. 취업을 성공적으로 한다는 것이 정착입니다. 제날짜에 월급을 받는 사람 그리고 매달 매출을 낼 수 있는 사람을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봅니다. 마음을 다 비우고 하나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서 본인을 성찰해 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매달 봉급을 주는 직원만 10명 거기에다 필요할 때 부르는 일용직까지 합치면 고용인 수가 더 늘어나는데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자도 4명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월급을 받는 자리가 아니고 월급을 주는 고용주의 입장에서 탈북민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애: 제가 한국에 와서 4년을 직업학교에서 일했는데 탈북민 교육만큼은 고용보험이 있는 회사에 6개월 이상을 다녀야 저희가 그런 훈련과정을 받았어요. 그런 과정이 한 25개 있었는데 건설, 자동차, 로보트 여러 가지 많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 취업 시킨다는 것이 워낙 힘들어요. 취업 자리는 많은데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니까 거기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일하는 거예요. 조금 괜찮은 회사는 탈북민을 잘 안 받으려고 하고요.

정작 제가 사업을 해보니까 이래서 탈북민들을 안 받는구나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탈북민을 안 쓰려고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답을 찾았어요. 그 원인이 뭐냐하면 북한에서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온분들, 부모 교육을 잘 받아서 인성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다른 사람 배려하는 법을 잘 모르는 분도 있고, 과거 생활의 연장으로 사람들 앞에서 성부터 내고 같이 쌍소리를 하고 문화를 잘 못 받아들여서 싸움을 하는 일이 많아요. 특히 저희는 건설회사라 한국분들 거친 사람이 많은데 그분들과 싸우고 해서 사업을 하면서 마음이 아팠는데 그것이 하루이틀 사이에 쉽게 없어지질 않더라고요.

남한에서의 생활 7년. 지금은 건설 중장비 업체의 경영인으로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관리자 일을 했지만 그 역할은 북한에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애: 네. 비교가 많이 되죠. 북한에 있을 때는 간부들도 파견장으로 인사조정이 됩니다. 북한에서는 사업이 아니었고 단지 선전선동이다 보니까 예를 들어 함경북도에 있는 주민이 수령을 어떻게 잘 따르게 하는가 그것에 초점을 맞춘거예요. 그렇게 해서 내 충성심을 김정일이 잘 알아줘서 내가 승진할 수 있겠는가를 신경 썼다면 여기는 직원이 10명이라고 하면 그 직원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챙겨야 해요. 그 사람들의 경조사, 복지 해줘야 하고 누구 직원 자녀가 결혼한다고 하면 가야 하고요. 금요일 저녁에는 회식을 해야하고 노조 비위도 맞춰줘야 하고요. 사장으로서의 무게가 북한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강연제강을 받아서 강연해주고 사람들 동기부여 시키고 하는 것보다 몇배는 힘듭니다. 그런데 그만큼 보람도 있습니다. 저는 통일이 되면 건설업이 먼저 들어갈텐데 탈북민들을 많이 키워서 고향에 데려가리라는 하는 결심이 섰기 때문에 몽둥이만 안 들었다 뿐이지 견디라고 하면서 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처음부터 사장은 아니었는데 본인도 그런 노동일을 해봤습니까?

이미애: 저는 한번도 못해봤습니다. 북한에서부터 사무직 일만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기 와서도 사람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어요. 불가능은 없다고 봅니다. 내가 결심하고 계획한 일은 다 실천으로 이어지더라고요.

탈북민의 남한생활 정착비결. 취업을 해라 그것도 전문 기술직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배워라.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된 기분으로 배워라. 이런 말을 하는 이 씨는 사업체 사장이기 전에 평범한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속마음도 내비쳤습니다.

이미애: 저는 사람들이 남자같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크게 됐겠다 하는데 공감은 하면서도 한편 서운해요. 여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데 북한에서 강제이혼 당하고 어려서 엄마를 잃었고요. 충실한 가정주부로 훌륭한 아내로 또 자랑스런 엄마로 살고 싶은데 저희 딸이 아파서 쓰려져서 투명 중이예요. 딸이 건강을 되찾으면 저도 결혼하고 딸 가족과 함께 외국 여행을 가고 싶은데 그런 소원이 죽기 전에 이뤄질지는 모르겠어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건설중장비 업체를 운영하는 탈북민에게 성공적인 남한사회 정착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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