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북송… 태어나 처음 느낀 분노 (1)

서울-이예진 leey@rfa.org
2024.07.11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북송… 태어나 처음 느낀 분노 (1) 2008년 4월 4일, 서울 중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중국 집회에서 한 인권 운동가가 중국 군복을 입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김정아: 20여 명 되는 사람들이 네 발로 두 줄로 마당을 기어다니는 걸 봤어요. 엉덩이를 빡빡 때리더라고요.

김은주: 더러운 년이라고 하고 떼놈이랑 어떻게 했다 그러고. 그냥 쓰레기… ‘너넨 인간 쓰레기다내 고향이지만 정말 내가 살 곳은 아니구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한옥정: 중국에서 사는 5년은 정말 지옥 같았거든요. 근데 저를 사 간 사람이죠. 그 사람은 아버지 엄마가 1급 지체장애인이었어요. 그러고 아들만 세 명이 있었어요. 근데 그 제가 큰아들한테 팔려갔는데 친척들이 천원, 천원, 천원, 천원 이렇게 모아서 조카 하나를 장가 보내준 거나 똑같은 거예요. 여자는 사왔는데 집 형편은 그 동네에서 제일 못 사는 거예요. 쓰러져가다 쓰러져가다 그런 초가집은 어디 그림에서도 못 봤어요. 자려고 누우면 발 밑으로 쥐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아버지, 엄마는 일어나 앉아 이잡이를 하고, 궤짝 안에 쥐가 부글부글하고 그런 환경이더라고요. 전 새벽 4시에 나가서 저녁 9시에 들어오고 애기를 업고 비료 바구니 앞에 메고 비료 치면서저는 그렇게 정말 동네 사람들이 혀를 두를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을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4년 농사를 지어서 큰 온실 같은 거 한 다섯 개 정도 지어놓고, 집 장만하고, 농사할 수 있는 경운기 같은 거 다 장만하고, 일단 할만한 건 다 해놓고 나왔거든요. 그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근데 그때도 불안한 상황이잖아요.

돈 벌러 중국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큰언니를 찾아 어머니, 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가 인신매매로 중국 남자에게 팔려간 한옥정 씨.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가 아이를 낳고, 머슴처럼 일해 그 집안을 일으켜 세웠지만 5년의 시간 동안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중국 남자와 결혼을 했어도 그녀는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무국적자, 도망자, 탈북자의 신분이었으니까요.   

 

노경미: 북한을 떠나서 불법 신분으로 있으니까 항상 정신상태는 오늘 밤을 자고 나면 내일이 무사할까항상 이 마음 속에는 시한폭탄을 안은 심정으로 살았지 사는 게

이경화: 거의 밖을 보면서 살았지, 밖에 나가서 살아본 적이 없었어요. 언제 잡혀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제가 중국에서 살고는 있으나 중국에서는 이경화란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약간 유령 같은 존재

김정아: 11일에 내가 두만강 넘어서 7월 초에 그 집에 팔려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마당에 있는 시퍼런 포도 있잖아요. 그걸 막 정신없이 따먹더라고요. 한참 따먹다가 내가 이거 왜 먹지이러고 그 다음에 놀라서 야 병원 빨리 좀 가자이랬거든요. 병원 가서 초음파를 해봤는데 그때 뱃속에 벌써 100일 되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날 밤에 공안이 들이쳤어요. 그날에. 북한 여자가 중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뱃속에 북한 아이를 임신된 채로 왔다? 결국 시 공안까지 끌려 올라갔죠. 그때 제 머릿속에 딱 하나만 기억이 났어요. 북한에 있을 때 청진시 보안소에 내가 갔을 때 내가 그때 뭘 봤냐 하면요. 20여 명 되는 사람들이 네 발로 두 줄로 마당을 기어다니는 거 봤어요. 엉덩이를 빡빡 때리더라고요. 그리고 아악 소리 치면서 줄을 쫙쫙 맞춰서 뛰는데 너무 충격이었어요. 왜냐면 제가 아무리 군생활 혹독하게 했어도 저희도 그런 훈련 못 받아봤거든요. ‘저 사람들 뭐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탈북자라고.

 

북한에 있었을 때 청진시 보안소에서 짐승 같은 취급을 받는 이들이 탈북자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던 군인 출신 김정아 씨는 북송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최후를 준비합니다.

 

김정아: 그래서 너네 나 북송시키겠다고 잡아왔지? 북송시켜라. 당신들 살아있는 나는 못 넘길 거야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해 시도를 했죠. 그 다음에 거기에서 남편이 한 시간 동안 전화를 돌리더라고요. 자기 직계 팔촌이 아니라 사돈의 팔촌, 간부인 그 팔촌이 전화를 해가지고 벌금만 받고 놔줘라. 그때 그렇게 살아남았어요. 계속 틈만 나면 저희 집에 와서 봤어요. 제가 살고 있는 거. 2 8개월 동안에 제가 살면서 단 하루도 발편잠을 제가 못 잤어요.

 

그런 정아 씨를 안쓰럽게 생각한 중국인 남편이 인맥을 총동원해 정아 씨를 빼낼 수 있었고, 정아 씨는 북송을 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감금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중국 공안이 정아 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기 때문이죠.

 

김명희: 제가 잡힐 때가 밤이었는데 갑자기 그 경찰차 소리가 막 나더니 딱 놀라는 순간 손전등 몇 대가 쫙 비치는 거예요. 집 안으로 향해서그냥 바로 손에다가 수갑을 딱 채우고 처음에 북송될 때는 아 이제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2023
년 국제인권연맹과 NKDB, 북한인권정보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으로 도망가 법적 지위나 보호 없이 은밀히 숨어 사는 북한 국적자는 최소 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는데요. NKDB 2003년부터 기록한 총 8 125건의 강제 북송 사건 중 74%인 약 6천 건은 탈북여성 피해자였습니다. 지금도 중국 공안이 잡으러 오는 악몽을 꾼다는 탈북여성들이 많은데요. 이들은 중국 공안보다 더 끔찍한 기억은 북송 후 교화소에서의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북송, 태어나 처음 느낀 분노 2이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한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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