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10대 소녀엄마의 꿈(1)
2023.07.2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과거 성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았던 한국에서는 점차 성교육과 인식개선을 통해 사회적인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는데요. 최근엔 10대에 부모가 된 일반인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까지 생겼습니다.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요. 주변의 편견을 이겨내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탈북여성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했지만 아이를 지키는 탈북여성들이 꽤 많으니까요.
생계를 위한
10대 소녀의 결심
마순희: 맞습니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간 거의 모든 탈북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었으니까요. 그때에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죠. 거부하거나 반항을 하면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그냥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든요. 오늘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고 누구든지 가정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오늘은 19살 어린 나이였음에도 가족을 위해 탈북을 선택했던 민지현 씨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직장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지현 씨는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보탬이 되려고 시장에서 장사도 해 보고 몇 십리 길을 걸어 농촌에 생필품을 가지고 가서 낟알로 바꾸어 오기도 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브로커가 접근했고, 지현 씨는 2005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지 1년 만에 중국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 온다고 친구들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지현 씨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2005년 9월, 한밤중의 두만강물은 뼈가 시릴 정도였지만 추위를 느낄 경황도 없이 변방대의 눈을 피해서 그래도 무사히 강을 건넜습니다.
김인선: 많은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났는데, 막상 중국에 도착하고 보니 브로커가 돌변했다고 하거든요. 지현 씨의 경우엔 어땠나요?
마순희: 지현 씨도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돈벌이를 시켜 준다던 브로커의 말은 거짓말이었고 중국에 도착하고 나니 시집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인신매매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거부할 수 조차 없이 지현 씨는 어린 나이에 한족 남편에게 시집을 가게 됐고 아들도 낳으며 말도 모르는 중국 땅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배고픔은 없었지만 가정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돈을 벌어서 북한에 보내려 했던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지현 씨는 아이 키우면서 농촌에서 한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국행을 지지해준 한족 남편
그러던 중에 한국에 먼저 정착한 사촌 언니와 연락이 닿았고 전화통화를 통해 지현 씨는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북한에서 고생하는 식구들에게 보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는데 지현 씨의 한국행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말도 모르는 한국에 갈 생각은 없지만 지현 씨의 한국행은 지지해 주었던 것입니다. 언제 잡혀 나갈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기보다 차라리 한국에 가서 마음 편히 살라고 한 것입니다.
덕분에 지현 씨는 중국에 들어간 지 4년만인 2009년 9월에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현 씨의 한국 입국 소식에 사촌 언니는 누구보다 기뻐했고 한국 정착 선배답게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지현 씨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촌 언니는 한국생활이 처음인 지현 씨에게 큰 의지가 되었습니다. 든든한 조력자라도 만난 듯 마음이 든든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피붙이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죠. 제가 만난 탈북 작가 한 분이 그러더라고요. 탈북민들에게는 한국에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곧 한국이라고요. 정착 초기에 고마운 분을 만났으면 한국은 고마운 곳이 되고 탈북민을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만났으면 한국은 불편한 곳이 된다는 거죠. 지현 씨에게 한국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마순희: 아마도 한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미더운 언니라서 지현 씨에게 한국은 살만한 곳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요? 든든한 지원군이 가까이에 있다는 안심 덕분인지 지현 씨는 처음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부터 자신감을 갖고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지현 씨가 입국한 당시에는, 탈북민들이 배정받은 지역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하나센터나 북한이탈주민 상담사 같은 제도들이 시행되기 전이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할 때였습니다.
한국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외국에 이민 갔을 때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상당수 그 사람의 직업을 결정한다는 말이요. 주유소 사장님이 나오면 그 사람도 주유소 계통에서 일하기 쉽고 상점(마트) 사장님이 나오면 상점에서 일한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지인의 소개로 일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겠지요. 탈북민들 중에도 지인의 소개로 일자리를 찾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우리 탈북민들의 경우에는 복지관이나 정착도우미들, 그리고 탈북민 신변보호를 담당하는 형사님들까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니까요. 2010년부터는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하나센터가 생기고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사들이 배치되어 보다 더 전문적으로 탈북민들의 초기정착부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북한, 중국 가족 생각에
돈벌이를 위한 삶 시작하다
김인선: 지현 씨는 다행히 사촌 언니도 있어 큰 시행착오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나이가 어려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은 마음도 많았을 지현 씨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요. 지현 씨는 가장 먼저 무엇을 시작했을까요?
마순희: 네. 25살 꽃다운 나이, 하나원 생활을 함께 하고 나온 친구들은 모두 희망에 부풀어 대학을 간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지현 씨는 일자리부터 찾았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지현 씨의 마음 속에는 가족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니까요. 북한에도, 중국에도 지현 씨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이 있었기에 지현 씨는 또래 친구들처럼 한가하게 하고 싶은 대로 놀고 배우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현 씨는 매일 발품을 팔아 일자리를 찾았고 특별한 기술이 없어 단순한 부업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일을 하면 일한 만큼 돈을 받을 수 있어서 지현 씨는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번 그 돈을 고스란히 북한의 식구들에게, 그리고 중국의 아들에게 보내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하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처음엔 단순노동에 가까운 부업을 하는데요. 일자리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돈도 크게 벌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공부를 하거나 자격증을 따게 되잖아요. 지현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지현 씨 역시 안정된 직장을 찾으려면 회사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컴퓨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컴퓨터 학원을 찾았습니다. 2009년 9월에 탈북민 초기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왔던 지현 씨는 5개월 정도 부업을 하고 이듬해 2월부터 컴퓨터 학원에 다녔습니다. 처음 배우는 모든 것이 어려웠지만 지현 씨는 컴퓨터 활용 자격증은 물론 전산회계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컴퓨터 학원에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한 수강생에게 취업의 기회도 줬는데요. 지현 씨도 대상자였습니다. 6개월의 컴퓨터 학원을 졸업하고 학원에서 소개해 주는 곳에 취업이 됐습니다. 이태원에 있는 회사인데 단순노동으로 부품 조립을 하는 회사였습니다.
김인선: 취업할 때 유리하려고 혹은 업무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거잖아요. 민지현 씨도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좀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컴퓨터 공부까지 했는데 지현 씨가 부품을 조립하는 단순노동에 만족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