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는 지금] 김정일 국제 재판소 제소 운동
캐나다-김계영 nk@rfa.org
2009.10.19
2009.10.19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국제 형사재판소 (ICC-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보내기 위한 서명 운동이 미국 워싱턴에 이어 이곳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번 서명 운동은 지난 9월 부터 시작 되었으며 이번 달 20일까지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300여명의 토론토 지역 주민들이 이번 서명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곳 토론토에서 ‘김정일 국제 형사 재판소 제소’ 운동에 총 책임을 맡고 있는 민주화 건설협의회 및 북한인권 협의회 박찬도 부회장을 만나 그분의 인권운동에 대한 삶과 이번 서명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박찬도 부회장의 인권 운동은 1960년 4.19 혁명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의 삶의 일부분 입니다.
1971년 이곳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온 후,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 ‘황장엽을 위한 모임’ 그리고 ‘북한 인권협의회’까지 그가 평생을 위해 일했던 모임들 입니다.
1972년 문재린 목사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는 이곳 토론토에서 반독재 정권에 맞서며 민주화 운동의 근원이 된 모임입니다.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 는 지금 2009년 까지 40년 가까이 이곳 토론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90대년에 이르러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 는 북한의 인권을 위한 움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1997년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씨가 북한체제의 잘못된 점을 알리자 그 당시 김대중 정부는 그를 가두고 더이상 북한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에 토론토에서는 ‘황장엽을 위한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황장엽씨가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 할 수 있도록 앞장서 움직였습니다.
박찬도 부회장의 ‘김정일 정권 비판’ 과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에 세워라’ 라는 일인 시위는 1996년 부터 2007년 까지 한국에 매해 들어 갈 때 마다 끊임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박찬도 부회장으로 부터 들어봤습니다.
박찬도 부회장: (한국에) 나갈때 마다15번 이상 대모를 했어. 그것도 마찬가지, 내가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을 해서 종각 지나서 그 세종로 교보문고 앞에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두어 시간 또는 서너시간 매 년 했어. 그때 내용은 그것도 마찬가지로 ‘김정일 타도’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에 재판소에 끌어 내라는것.
이어 박찬도 부회장은 2007년에 미국 뉴욕으로 가, 유엔 본부 앞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 세우게 하라’는 일인 시위를4개월 동안 39번에 걸쳐 하였습니다. 이번 김정일 국제 형사 재판소 서명 운동을 하게 된 이유 역시 자신의 오랜 믿음이었기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고 박찬도 부회장은 말했습니다.
박찬도 부회장: 나는 북한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에 끌어 내는것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평소에 생각을 해 왔기 때문에, 내 마음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그 성과가 얼마큼 있든 없든, 그것은 그때의 문제고 하여간 하면은, 한것 만큼의 성과가 있는 법이라고. 김정일이 쫓겨 났든 안 쫓겨 났든 쫓겨 나는데 그 만큼 보탬이 되는거라고, 그러니까 누구든지 열심히 해야지.
50년 가까이 반독재 운동과 북한 인권 운동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앞장섰던 박찬도 부회장의 열정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찬도 부회장의 자동차 번호는 “자유” 입니다. 박찬도 부회장은 자유의 이름만큼 이 세상에 값진 것은 없다며 북한의 자유가 하루 빨리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자유아시아 방송에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캐나다 토론토 에서 RFA 자유아시아 방송 김계영 이었습니다.
이번 서명 운동은 지난 9월 부터 시작 되었으며 이번 달 20일까지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300여명의 토론토 지역 주민들이 이번 서명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곳 토론토에서 ‘김정일 국제 형사 재판소 제소’ 운동에 총 책임을 맡고 있는 민주화 건설협의회 및 북한인권 협의회 박찬도 부회장을 만나 그분의 인권운동에 대한 삶과 이번 서명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박찬도 부회장의 인권 운동은 1960년 4.19 혁명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의 삶의 일부분 입니다.
1971년 이곳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온 후,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 ‘황장엽을 위한 모임’ 그리고 ‘북한 인권협의회’까지 그가 평생을 위해 일했던 모임들 입니다.
1972년 문재린 목사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는 이곳 토론토에서 반독재 정권에 맞서며 민주화 운동의 근원이 된 모임입니다.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 는 지금 2009년 까지 40년 가까이 이곳 토론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90대년에 이르러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 는 북한의 인권을 위한 움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1997년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씨가 북한체제의 잘못된 점을 알리자 그 당시 김대중 정부는 그를 가두고 더이상 북한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에 토론토에서는 ‘황장엽을 위한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황장엽씨가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 할 수 있도록 앞장서 움직였습니다.
박찬도 부회장의 ‘김정일 정권 비판’ 과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에 세워라’ 라는 일인 시위는 1996년 부터 2007년 까지 한국에 매해 들어 갈 때 마다 끊임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박찬도 부회장으로 부터 들어봤습니다.
박찬도 부회장: (한국에) 나갈때 마다15번 이상 대모를 했어. 그것도 마찬가지, 내가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을 해서 종각 지나서 그 세종로 교보문고 앞에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두어 시간 또는 서너시간 매 년 했어. 그때 내용은 그것도 마찬가지로 ‘김정일 타도’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에 재판소에 끌어 내라는것.
이어 박찬도 부회장은 2007년에 미국 뉴욕으로 가, 유엔 본부 앞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 세우게 하라’는 일인 시위를4개월 동안 39번에 걸쳐 하였습니다. 이번 김정일 국제 형사 재판소 서명 운동을 하게 된 이유 역시 자신의 오랜 믿음이었기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고 박찬도 부회장은 말했습니다.
박찬도 부회장: 나는 북한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김정일을 국제 재판소에 끌어 내는것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평소에 생각을 해 왔기 때문에, 내 마음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그 성과가 얼마큼 있든 없든, 그것은 그때의 문제고 하여간 하면은, 한것 만큼의 성과가 있는 법이라고. 김정일이 쫓겨 났든 안 쫓겨 났든 쫓겨 나는데 그 만큼 보탬이 되는거라고, 그러니까 누구든지 열심히 해야지.
50년 가까이 반독재 운동과 북한 인권 운동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앞장섰던 박찬도 부회장의 열정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찬도 부회장의 자동차 번호는 “자유” 입니다. 박찬도 부회장은 자유의 이름만큼 이 세상에 값진 것은 없다며 북한의 자유가 하루 빨리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자유아시아 방송에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캐나다 토론토 에서 RFA 자유아시아 방송 김계영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