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중국의 갈등과 분쟁 (1)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9.01.08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1969년 중국 병사들이 말을 타고 소련과 분쟁 중인 국경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1969년 중국 병사들이 말을 타고 소련과 분쟁 중인 국경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ASSOCIATED PRESS

- 1930년대 초부터 중∙소갈등 본격화

-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중국, 소련에 위기감

- 흐루쇼프 “모택동은 못 사는 나라의 지도자”

- 소련과 서방국가 사이에 중국 무시하는 태도 팽배


공산주의 역사를 보면 피를 나눈 형제, 혈맹을 중시하는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갈등과 대립은 존재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의 큰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과 중국 사이의 분쟁이 대표적인 예인데요, 두 나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교수님.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나 충돌, 무장대립은 있을 수 없고, 모두 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1940년대 말 공산주의 국가들이 많이 생겼을 때, 그들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 음모가 매우 심했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소련과 중국의 관계인데요. 1940년대 말에 영원한 친선을 약속했던 두 나라가 1960년대에는 전투까지 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란코프 교수] 우리는 제일 먼저 역사를 봐야 합니다. 1950년대 말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중국 측은 이 위기의 원인이 소련에서 발생한 스탈린 격하 운동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였던 모택동은 죽을 때까지 스탈린을 극찬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속마음과 달랐습니다. 1930년대 초부터 스탈린과 모택동이 각각 최고 지도자가 된 다음부터 대립은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 갑자기 왜 그렇게 됐을까요? 공산주의 사상에서는 국제주의와 국제 연대성을 아주 많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모택동이나 스탈린 모두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나요?

[란코프 교수]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 혁명 2세대입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공산주의는 그저 이론뿐이었습니다. 당시 혁명가 1세대들은 자신의 머릿 속에 아름다운 그림만 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정치를 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탈린이든 모택동이든 둘 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세계 혁명을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자국의 이익은 추상적인 세계 혁명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모택동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1940년대 말 동유럽에 등장한 공산 국가들을 보면 그들의 인구는 많아도 2천500만 정도였습니다. 당시 소련의 인구가 2억 명 정도였는데, 동유럽 국가들의 인구는 소련의 1/10에서 1/15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완전히 다릅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5천500만 명으로 소련보다 거의 3배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환영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과 국민당 세력이 타협하고, 중국이 분단되기를 바랐습니다. 통일 중국은 소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았고, 전략적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 그렇다면 모택동과 그 측근들은 소련과 스탈린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란코프 교수] 대부분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처럼 모택동은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또 모택동은 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하고 불평등한 조약을 맺은 서양 제국주의 나라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택동은 스탈린이 중국 혁명을 반대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모택동은 중국 민족주의, 특히 중국 한족의 민족주의를 민중 동원 사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 하지만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에 대한 중국 측의 태도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란코프 교수]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해 큰 신뢰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존경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을 대체한 흐루쇼프 서기장은 공산혁명 활동 경험이 거의 없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택동이 보기에 매우 위험한 정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미국과 평화공존 이야기입니다. 1950년대에 모택동은 사실상 세계 어디에서나 가능한 한 많이 반미국 혁명운동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모택동이 그런 정신을 가졌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1970년대 초에 들어와 모택동의 중국은 미국과 같이 소련에 반대하는 연대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모택동은 자신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혁명 세력의 최고지도자라고 생각했고,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을 방해할 생각이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흐루쇼프 서기장은 중국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란코프 교수] 흐루쇼프 서기장은 애초 모택동에 대해 중국 혁명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에 대한 반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기술과 경제 발전을 굳게 믿었던 흐루쇼프 서기장은 중국을 낙후한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모택동은 누구였을까요? 단지 인구가 많고, 어렵게 사는 나라의 지도자에 불과했습니다.

- 그렇다면 양측은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다고 볼 수 있나요?

[란코프 교수] 어느 정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중국의 대립에 더 깊은 뿌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혁명이 성공한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소련을 비롯한 서방 나라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매우 심했습니다. 1957년에 모택동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동풍이 서풍을 제압하고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흐루쇼프 서기장뿐 아니라 소련 사람들은 중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련은 기술의 힘, 현대 과학의 힘을 굳게 믿었습니다. 흐루쇼프 서기장뿐 아니라 대부분 소련사람은 소련이 중국보다 기술과 공업 수준이 훨씬 높아서 당연히 중국이 소련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혁명 정신을 많이 강조했고 사상동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중국 공산당의 태도는 소련 측에 많은 짜증을 불러왔습니다. 소련의 비공개자료에 따르면 벌써 1950년대 말부터 모택동의 정책을 비합리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정책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 교수님, 소련 측은 모택동의 정책을 왜 이렇게 비판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 소련 언론에서 많이 나온 모험주의라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객관적인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착각과 환상에 따라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대약진과 인도와의 대립이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소련과 중국의 갈등∙대립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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