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이야기 (1)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2.04
albania_woman_b 1992년 알바니아의 한 여성이 땔감을 지고 집으로 가고 있다.
/AP Photo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공산권의 역사를 보면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60-70년대 당시에 공산주의국가 대부분은 소련을 지지했습니다. 중국을 지지한 나라가 있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었는데요, 알바니아는 그 중의 하나이지요?

란코프 교수: 솔직히 말하면 중국을 무조건 지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시대의 북한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들은 소련과도, 중국과도 등거리를 유지하면서 양측에서 이익을 얻어내려 노력했습니다. 사실상 얼마 동안 중국을 열심히 지지한 나라는 하나 뿐입니다. 이 나라는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 제일 못 살 뿐만 아니라 규모도 제일 작은 나라입니다. 바로 알바니아입니다.

기자: 알바니아라면 우리 북한 청취자들은 공산주의 국가 가운데서도 유례없는 폐쇄정책을 편 엔베르 호자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듯한데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알바니아는 1960-70년대 중국을 따라갔을 때, 북한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들어와 알바니아는 중국과 관계를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공격했습니다. 물론 알바니아는 동시에 미국과 소련을 여전히 미친듯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북한과 알바니아 사이가 조금 나빠졌습니다. 당시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알바니아와 가까운 관계가 있으면 소련과도, 중국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1970년대 알바니아는 소련과도, 미국과도, 중국과도 관계를 차단한 나라였나요?

란코프 교수: 네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보기에는 알바니아는 너무 작고 너무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우 흥미로운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 이유는 알바니아만큼 북한과 비슷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나라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바니아의 인구는 북한의 10분의 1밖에 안 됐는데요. 1960년대 초 알바니아의 인구는 150만 명 정도였는데, 2019년에도 300만 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알바니아의 지도자 호자의 정책과 김일성의 정책은 매우 비슷합니다. 알바니아에서 호자 지도부가 모택동을 공격하기 전까지, 호자와 김일성은 매우 가까운 개인적 관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도 많이 있습니다.

기자: 알바니아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나라가 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아마 제일 먼저 알바니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바니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5세기에 들어와 알바니아는 터키 제국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알바니아는 잘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고, 터키제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터키제국의 통치시대는 오늘날도 알바니아에서 암흑시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일제시대를 생각하는 것과 조금 비슷합니다. 터키제국은 18세기에 들어와 산업혁명도 자본주의 발전도 없었습니다. 터키제국은 원래 발전된 나라였지만 갈수록 낙후한 봉건국가가 되어갔습니다. 이 낙후되는 터키제국에서알바니아는 어떤 위치였을까요?

기자: 글쎄요. 시골이 아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그냥 시골이 아니었습니다. 낙후된 나라 중에서도 매우 멀고 가장 뒤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물론 알바니아에서도 18세기 말부터 독립운동이 있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매우 걸렸습니다. 결국 터키제국이 사실상 무너져 버리기 직전인 1912년에야 겨우 독립했습니다. 당연히 자본주의식 식민지보다 더 낙후하고 열악한 봉건 식민지의 잔재가 알바니아에 아주 많았습니다. 공업이 거의 발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대부분은 소작농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주들도 절대 잘 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와의 관계는 쉽지 않았습니다.

기자: 알바니아는 왜 이처럼 낙후된 나라가 되었을까요? 터키제국은 어째서 알바니아를 아예 발전시키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터키제국은 자기 나라 본국도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멀고 먼 알바니아를 개발할 능력도, 관심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기자: 독립한 알바니아는 이웃 나라와 문제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1912년 독립한 알바니아의 이웃나라는 세 개 뿐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입니다. 세 나라 모두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본 이유는 그리스도 유고슬라비아도 알바니아처럼 터키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지역들 사이에서 주민들은 자유롭게 이동했습니다. 결국 알바니아에서 그리스 말을 쓰는 그리스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스는 그리스인들이 사는 땅을 모두 옛날 자기 땅이라고 주장해서, 알바니아와 갈등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에서 코소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기자: 코소보라면 90년대에 아주 시끄러웠던 지역이 아닌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거의 100년동안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서로 매우 싫어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국가가 해체될 때, 코소보라는 지역은 알바니아와 세르비아가 싸우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기본 이유는 원래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만, 오늘날 인구 절대 다수는 알바니아 사람들입니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100년 전에도, 지금도 이 주장을 매우 싫어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반대합니다. 지난 100년 동안의 알바니아의 역사를 보면, 이 나라의 정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유고슬라비아와의 대립입니다.

기자: 이웃 나라인 그리스는 알바니아의 국토 일부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고, 알바니아는 이웃 나라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해서 대립이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이웃나라인 이탈리아는 어떨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대립이 많았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당시에 이탈리아는 제국주의 야심을 많이 가졌는데, 알바니아를 로마제국 시대 자신들의 영토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조만간 합병할 생각이 많았습니다. 어느 정도 19세기 말부터 일본이 한반도를 보는 눈과 비슷합니다.

기자: 1912년 알바니아는 독립한 다음에, 국제 상황도 나쁘고, 이웃 나라와도 관계가 아주 나쁠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 매우 낙후한 상황입니다. 국내 정치 상황은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알바니아는 얼마 동안 공화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혼란스러웠고, 1920년대에 왕국이 되었습니다. 알바니아의 왕 조구 1세는 국내에서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지주들이 지배하는 농업 경제 구조를 여전히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여전히 낙후한 봉건국가입니다. 당연히 식민지 시대 조선처럼 공산주의 사상이 인기가 많고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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