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이야기 (3)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2.18
Hoxha_shehu_b 1959년 알바니아를 방문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가운데)와 알바니아 셰흐 내무상(왼쪽), 그리고 알바니아 노동당 총서기 호자(오른쪽).
/AP Photo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 시간에 공산화된 알바니아가 유고슬라비아와 많이 대립했다고 하셨는데요. 알바니아 지도자 호자는 어떤 정책을 폈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갓 공산화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정책을 폈습니다. 제일 먼저 소위 인민민주주의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물론 토지개혁도 있었고 공업국유화도 있었습니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구조가 등장했습니다. 소련이 40년대 말부터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찌또(치토)와 열심히 싸우기 시작했을 때, 알바니아는 당연히 소련을 열심히 지지했고, 소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와 상황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숙청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나요?

란코프 교수: 많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호자는 자신을 반대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고급 공산당 간부들을 많이 숙청했고, 처형했습니다. 당시에 호자가 싫어했던 간부들은 유고슬라비아 간첩, 찌또의 졸개라는 딱지가 부쳐져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먼저 호자는 내무상 조제와 손을 잡고 당중앙 비서 겸 경제상 스피루를 숙청했습니다. 스피루는 체포되기 하루 전에 자살했습니다. 호자는 스피루를 유고슬라비아 간첩으로 숙청한 내무상 조제에 대해 공포가 생겼습니다. 당시에 조제는 알바니아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호자는 조제 제거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호자는 소련 대사에게 내무상 조제가 바로 유고슬라비아 간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조제는 체포되었고, 고문을 받았고, 처형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조제를 권총으로 처형한 사람은, 1949년에 조제의 후임자로 내무상이 된 셰흐라는 사람입니다.

기자: 진짜 끔찍한 ‘개싸움’입니다. 새로 내무상이 된 셰흐는 어떤 운명을 맞이했나요?

란코프 교수: 개싸움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공산주의혁명이 생긴 이후 모든 공산국가에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혁명을 꿈꾸었던 혁명가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서로 미친듯이 죽이기 시작합니다. 서로 손가락질하고 상대방을 수정주의자, 매국노, 간첩이라고 외치며 죽이는데, 이 개싸움에서 제일 교묘하고 잘 싸울 줄 아는 개가 권력을 장악합니다. 셰흐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949년에 공산주의 알바니아 내무상이며 당중앙 비서였던 조제를 직접 처형한 알바니아 셰흐 내무상은 1981년에 자신이 곧 체포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보통 다른 공산국가에서 보위부를 담당한 사람들은 몇 년 살기도 힘들었습니다. 셰흐는 30년이나 살았습니다.

기자: 1950년대 들어와 호자는 알바니아에서 절대 권력자가 되었는데요. 한편으로 1950년대 들어와 알바니아의 외교 상황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기본 이유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입니다. 1950년대말 알바니아는 같은 무렵의 북한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김일성처럼 호자는 소련 흐루시초프 서기장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호자는 같은 운동이 알바니아로 확산될 경우, 자신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자도 김일성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김일성은 당시에 흐루시초프가 주장한 평화공존론에 대해 짜증이 많았습니다. 호자는 흐루시초프가 유고슬라비아와 관계를 개선하고, 얼마전까지 시끄럽게 비난하던 찌또와 수뇌상봉까지 한 것을 보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흥미롭게도 북한과 알바니아는 이 시기 비슷한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생겼습니다.

기자: 무엇인가요? 지도자에 반대하는 시도인가요?

란코프 교수: 그렇습니다. 1956년 북한에서는 8월 종파 사건이 있었고, 같은 해 알바니아에서도 매우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을 비롯한 고급간부들은 김일성을 해임시키려 계획했지만,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1956년 봄, 알바니아공산당 고급 간부 몇 명은 호자를 비판하고, 소련처럼 주민 생활 수준을 높이는 정책을 하며, 대외 긴장을 완화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호자의 해임을 요구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당연히 호자에 도전한 사람들의 운명은 사형장이나 감옥뿐입니다.

기자: 김일성도, 호자도 1950년대 중반에 매우 비슷한 위기에 빠졌지만, 그들 모두 승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란코프 교수: 둘 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분쟁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모두 권력을 장기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가능했을 지 의심스럽습니다. 1950년대 말 알바니아도, 북한도 소련에 심하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이 실시하기 시작한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1950년대 말에 흐루시초프의 정책이 수정주의라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바니아에서도 북한에서도 최고 지도자들은 중국과 손을 잡는다면 소련의 압박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1950년대 말부터 호자 제1비서는 중국 모택동 주석보다 더 시끄럽게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61년에 호자는 흐루시초프를 반맑스주의자, 수정주의자 패배주의자라고 선언했고, 며칠 이내에 소련과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은 알바니아와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당연히 그 전에 많이 있었던 소련의 지원은 없어졌습니다. 소련 당국자들은 자기 나라를 미친듯이 비난하는 나라에 원조를 줄 이유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기자: 호자의 정책은 매우 비합리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소련을 지나치게 공격해서 결국 원조를 아예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요.

란코프 교수: 약간 다릅니다. 당시에 소련은 알바니아에 압박을 가하고, 알바니아도 스탈린 격하 운동에 참가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소련은 수많은 간부들과 일반 주민들을 숙청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호자에게 요구했습니다. 만약에 호자가 소련의 압박에 굴복했다면 얻을 것이 무엇일까요? 호자는 1940년대말-50년대 초 원래 무장독립투쟁을 했던 지도자 대부분을 유고슬라비아 간첩 딱지를 씌워서 제거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흐루시초프 서기장의 압박에 굴복했다면, 옛날 숙청에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기 불가능했습니다. 호자가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소련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 것 뿐입니다. 물론 알바니아 국익 입장에서 소련 공격은 비합리주의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자와 그 측근들의 입장에서 소련을 마구 공격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물론 중국과 소련이 다투기 시작한 것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호자는 중국에서 나온 지원을 많이 받았고, 첫 단계에서 중국이 제공한 지원과 원조는 소련에서 받았던 원조를 잘 대체했습니다.

기자: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