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당 코민테른과 좌파 지식인들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03.05
three_big_communist_b 러시아 혁명을 이끈 3명의 리더. 왼쪽부터 스탈린, 트로츠키, 레닌.
AP PHOTO

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 시간에는 소련과, 발전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즉, 코민테른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1920년대 말 들어와 코민테른 운동이 점차 약화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란코프 교수: 지난번에 말한 바와 같이, 1919년에 레닌을 비롯한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을 창립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혁명은 시작할 기미가 없었습니다. 중국과 같은 아시아 나라들에서 공산혁명의 움직임이 많았는데, 잘 사는 나라에서는 그럴 조짐이 없었습니다. 1930년대 초 자본주의 나라들은 전례없이 매우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졌습니다. 바로 세계 대공황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기는 했는데, 그러나 혁명 수준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1930년대 초 소련 독재자가 된 스탈린은 세계혁명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전: 스탈린은 세계혁명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바꾸었나요?

란코프: 스탈린은 세계혁명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국제주의자보다 민족주의자 였습니다. 레닌을 비롯한 1917년 혁명시대 러시아공산당 간부들은 독일이나 영국과 같은 서방국가들이 향후 세계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스탈린도 세계혁명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조건은 소련, 즉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혁명만 가치가 있다는 조건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스탈린은 추상적인 세계혁명보다,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의 영향력과 힘을 확산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북한 역사나 중국 역사를 보면, 매우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모택동이든 김일성이든 세계혁명에 대해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 무엇보다 자신의 국가이익만 생각하였습니다. 소련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지만, 흥미롭게도 공산주의 운동을 한 유럽 좌파들은 이 사실을 처음에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전: 유럽 좌파들은 소련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란코프: 그들은 소련을 세상에 둘도 없는 지상낙원이자, 앞으로 생길 세계혁명의 선봉자라고 생각했기때문에, 소련을 도와 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과 소련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박한 유럽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나라를 완전히 무시하고, 희생할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자기 나라는 무엇일까요? 부패하고 악독하고 곧 당연히 무너져야 할 썩은 소굴이었습니다. 사실상 세계공산당 대부분은 당시에 소련이 관리하는 앞잡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전: 이러한 현상이 세계 공산당과 좌파세력의 정치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란코프: 흥미로운 현상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1939년 9월에 제2차 대전이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무렵에 스탈린은 제2차 대전 참전을 회피하기 위해, 파쇼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사실상 그 조약 때문에 거의 2년동안 소련과 파쇼독일은 거의 동맹 관계였습니다. 당시에 파쇼독일과 싸우던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어떤 태도였을까요? 그들은 이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는 파쇼독일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충실한 공산주의자라면, 파쇼독일 군대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1941년 6월에 파쇼독일이 소련을 침략하자마자, 영국공산당이든 프랑스공산당이든 자신의 태도를 즉각 180도로 바꾸었습니다. 이들이 거의 2년동안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치부한 전쟁은 즉각적으로 정의스러운 전쟁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전: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세계 공산당 세력은 거의 2년동안 히틀러와 파쇼독일을 사실상 옹호했다는 말씀인데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소련은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착각을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1920-30년대 소련 첩보기관은 세계적으로 제일 성공적인 첩보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근본적 이유는 그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힘이 많은 좌파 지식인들과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 공작원들은 아무 때나 젊은 좌파지식인들을 찾아서, 소련을 위해 협력하자고 제안만 하면, 지식인들은 소련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당연히 사상 때문에 일하는 간첩들은, 돈이나 협박 때문에 일하는 간첩들보다 훨씬 더 우수합니다. 1940년대 초 미국이 핵개발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유명한 학자들은 이 사업에 많이 참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공산주의사상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소련 첩보기관과 협력하고, 극비자료를 소련으로 많이 알려 주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 첩보기관들은 옛날 자료를 많이 공개했는데, 당시에 소련과 협력했던 핵기술자, 핵물리학자가 10명정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소련이 핵무기 관련 정보를 이들로 부터 이만큼 빨리 받지 못했다면, 소련 핵개발은 실제보다 5년이나 10년 정도 늦어졌을 것입니다. 소련은 당시에 이러한 공작을 매우 많이 했습니다.

전: 그렇다면 제2차 대전 이후에 유럽 좌파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궁금합니다.

란코프: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소련은 제2차 대전의 승리에서 너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소련의 인기는 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물론 전쟁 때문에 수많은 소련 사람들은 해외로 도망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때문에 이들을 통해, 그 전에도 없지 않았던 숙청과 기근과 같은 소련의 실상을 전해주는 얘기가 더 많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말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인 대부분은 여전히 소련에 대해 나쁜 이야기들은 전부 다 반동세력의 거짓말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급기야 유럽 공산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1950년대 말 스탈린 격하 운동입니다. 소련당국이 어두운 실상을 인정한 때에서야 지식인들은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