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조 사건과 사회안전성 부활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0.07.22
department_name_change_b 2017년 9월 23일 열린 반미관련 인민보안성 군인집회 모습. 남쪽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북한 인민보안성이 명칭을 사회안전성으로 변경한 사실이 지난달 3일 확인됐다.
/연합뉴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얼마전에 북한이 1990년대말 심화조 사건과 함께 사라졌던 사회안전성 명칭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근 2만 5천명을 숙청 유배 시킨 북한 판 ‘문화대혁명’ 심화조 사건은 1990년대말 사회안전성에 의해 자행됐습니다.

외부에는 심화조 사건이 김일성 사망 이후 권력 유지에 극도의 불안을 느끼던 김정일이 매제 장성택을 시켜 사회안전성이 저지른 최대의 정치적 숙청사건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에서 발간된 책자에 따르면 심화조 사건은 단지 채문덕을 비롯한 몇몇 불순 적대 분자들의 망동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수령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소위 ‘수령 무오류’ 원칙이 다시금 북한이 발간한 심화조 사건의 책자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북한이 심화조 사건과 사라졌던 사회안전성을 부활시켰을까?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에 알아보겠습니다.

북한은 1990년대 말 2만5천명 이상 숙청된 심화조 사건을 인정하는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2010년 사망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제강의 회상기 형식을 빌어 나온 책자에는 심화조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김씨 일가의 3대 권력세습을 옹립하는 데 특출한 공헌을 한 리제강이 심화조 사건을 극좌적으로 몰고간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을 비롯한 일당을 숙청한 과정을 서술한 내용입니다.

책자에 따르면 북한이 벌인 심화조 사건의 정확한 명칭은 ‘특별주민료해심화조’입니다.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과 참모장 황윤모 등 심화조가 6.25전쟁때 평양시 용성구역 일대에 잠입한 간첩들을 소탕한다는 명분하에 주민등록 문건에 공백이 있는 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이 사건은 발단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당시 심화조 사건을 주도했던 채문덕이 자기의 정치적 목적과 야심을 이루기 위해 서윤석 평양시당 책임비서, 김기선 개성시당 책임비서, 최고 검찰소 초급당비서 피창린을 비롯한 무고한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을 사회안전성 일개 부서의 일탈 행위로 묘사하고 책임있는 당사자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배려로 서윤석, 김기선 등 심화조 사건의 피해자들의 정치적 생명이 복권되고,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위로연까지 베풀었다고 인덕정치, 광폭정치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외부 사회에 알려진 심화조 사건은 이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내용이 다릅니다.

당시 심화조 사건에 관련되었던 전 북한 사회안전성 감찰과 출신 탈북자 박문일 씨는 심화조 사건은 김일성 사망 이후 권력유지에 불안을 느낀 김정일이 김일성 측근을 제거해 절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적 숙청사건이라고 폭로했습니다.

박씨는 심화조 사건의 전말 수기에서 “심화조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김일성 사망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운운해 인민의 재산을 수탈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인민의 마음을 잃어 체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정일은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지냈던 매제 장성택에게 정적 숙청에 대한 특별임무를 주었고, 장성택은 리철 중앙당 조직지도부 사회안전성 담당 지도원과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과 짜고 심화조 사건을 꾸미게 되었다고 박씨는 밝혔습니다.

김일성과 함께 북한을 공동 통치를 하던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홀로 서게 되었습니다. 구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연이은 자연재해와 경제파탄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김정일은 매부 장성택에게 특별임무를 주어 정적 숙청을 했다는 게 외부 사회에 알려진 심화조 사건입니다. 거기에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과 심화조는 사냥개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심화조는 ‘간첩색출’ 명목으로 사회안전성에 설치된 특수조직이었는데, 평양과 지방의 안전원8천명이 소속되어 3년동안 활동했습니다.

심화조는 평양과 지방에서 일제히 주민들의 경력을 재조사하고, 사상에 의심이 있거나, 이력에 조금이라도 공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심층 심문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북한판 ‘문화대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1960년대와 70년대 근 10년동안 모택동의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습니다. 모택동은 근 4천만명이 굶어 죽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요. 공산당 권력과 영향력이 등소평과 류소기에게로 넘어가려고 하자, “무산계급문화대혁명 완수”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반전을 노립니다.

모택동은 류소기, 팽덕회, 팽진 등 자신과 항일투쟁을 함께 하고, 장개석 국민당 군대와 함께 싸웠던 옛 전우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모택동의 선동에 따라 중학생과 대학생으로 수만명의 홍위병이 조직되고, 이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모택동의 사상과 배치되는 사상을 ‘구시대적’, ‘부르주아적’이라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철저히 파괴하는 급진성을 보였습니다.

결국 중국 국가주석이던 류소기는 실각 당해 홍위병들에게서 매를 맞고 사망에 이르렀고, 6.25전쟁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팽덕회는 어린 홍위병들에게서 돌팔매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 벌어진 심화조 사건에서도 서관히 노동당 농업담당비서는 식량난을 일으킨 간첩으로 몰려 평양 시내에서 공개 총살당했고, 장성택의 정적이었던 문성술 노동당 본부당 책임비서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평양시당 책임비서 서윤석은 안전원들에게서 모진 고문을 받고 정신 이상자가 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던 김만금 농업위원회 위원장은 부관참시 당했습니다.

근 4년동안 심화조 사건으로 피살당한 사람은 1만여명, 1만5천명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민심이 흉흉해지고, 책임의 화살이 자기에게 향해지자 채문덕을 비롯한 심화조 사건의 주동분자들을 ‘혁명대오 안에 끼어든 불순 이색분자’로 몰아 총살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몇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북한 내부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다 감지하는 철저한 보위부 통보선, 노동당 조직부 일보선을 운영하는 김정일이 이 엄청난 심화조 사건이 근 4년동안 벌어질 때까지 과연 몰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사회안전부에서 공개처형 등 중요한 사법권은 김정일의 승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다른 부서도 아닌 자기와 한 건물에서 일하는 노동당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 평양시당 책임비서 서윤석 등 노동당 고위 간부들이 사회안전성 밀실에 끌려가 고문 받고, 서관히 농업담당 비서가 총살당할 때까지 과연 김정일은 몰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사냥꾼이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쓸모가 없게 된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이른바 ‘토사구팽’ 격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채문덕을 시켜 자신의 정적들을 친 다음, 채문덕까지 처리해 증거를 말끔히 없애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평양시 출신의 탈북민은 “당시 북한당국이 심화조 사건에 걸려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풀어주자,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면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면서 강제 이혼당했던 어떤 남성은 집으로 돌아와 자기 안해가 다른 남자와 같이 사는 모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진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회안전성 심화조는 사건에 연루자들을 정치범 수용소로 끌어갈 때, 수용소에 가지 않겠다는 부부를 강제 이혼시키고 본인만 끌어갔습니다. 이렇게 심화조 사건이 해명되어 평양시로 복귀한 피해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 도서는 김정일이 심화조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서윤석, 김기선, 피창린 등을 복권시키고 그의 가족들을 위해 창광봉사관리국의 2개 식당에서 위로연까지 차려주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박씨는 “2만 5천명의 피해자 중에 죽거나 자살한 사람이 무려 40%나 되니 수용소의 참상을 짐작할 만하다”며 “후에 김정일은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벌였지만, 의도와 달리 김정일을 고발하는 성토장으로 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후 김정일은 사회안전성 이름만 들어도 화가 난다며 2000년 4월 인민보안성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심화조 사건은 희미 해졌지만, 사회안전성 이름이 부활하면서 그 잔혹성을 다시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심화조 사건은 북한 정치사에서 거대한 정치숙청사건으로 김씨 왕조가 저질러 놓은 죄악 중에 또 하나의 커다란 죄악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고,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졸았다고 공개처형하는 등 제2, 제3의 심화조 사건은 김정은 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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