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기획 “동독 난민 이야기” - 볼프강 웰쉬의 동독 탈출기

200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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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동독이란 나라는 냉전 시절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있다 지난 90년 서독에 의해 전격적으로 흡수 통일된 나라입니다. 당시 동서독 통일의 물꼬를 튼 데는 공산주의 붕괴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서독행을 감행한 동독 난민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은 볼프강 웰쉬(Wolfgang Welsch)씨의 동독 탈출기를 들어봅니다. 진행에 김연호 기자입니다.

동독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있던 볼프강 웰쉬 씨는 서독정부의 도움으로 1971년에 서독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웰쉬 씨는 이미 1963년에 동독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처음에 어떤 이유로 동독을 탈출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Wolfgang Welsch: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동베를린에 있는 연극학교를 다녔었는데요, 거기서 저는 동독의 공산 &# xC8FC;의 정권아래서는 제가 연극인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도 받아주질 않아서 이 연극학교를 다녔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동독 정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체제였기 때문이죠. 자기가 믿고 있는 &# xBC14;나 자기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얘기했다가는 즉시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동독체제를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서 동독정권에 대한 저항을 계속 &# xD588;습니다.

가족들도 함께 탈출을 시도했습니까?

WW: 아니요.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친구들이나 심지어 제 소지품까지 모두 남겨놓고 저 혼자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동독을 탈출할 용기도 나지 않고 또 그럴 힘도 없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있기로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스무 살이었는데요, 가족과 헤어지는 게 특별히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저한테는 동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 가족들도 마음으로 항상 저를 응원해줬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동독을 탈출하셨습니까?

WW: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았던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저는 서독을 드나들 수 있는 신분증이 있었습니다. 이 신분증을 국경수비대에 보여줬죠. 그런데 이것 말고 또 다른 허가서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 가서야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저는 독일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자기 차에 태워서 국경까지 저를 데려다 준 친구도 함께 붙잡혔습니다. 친구와 저는 그대로 동독 국가보위부 (Ministerium fuer Staatssicherheit, MfS)가 운영하는 비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동독 경찰에 체포된 다음에는 고초를 많이 겪으셨을 것 같은데.

WW: 체포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고문과 학대가 시작됐습니다. 2년 동안 국가보위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툭하면 얻어맞고 차가운 독방에 열흘 동안 갇혀있기도 했습니다. 보위부는 심지어 저를 처형장으로 끌고 가서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다 또다시 국가반역과 범법기관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보위부에 체포되기 전에 제가 유엔에 편지를 보낸 사실이 발각됐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에는 독일의 인권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보위부가 저희 집을 수색하면서 편지 사본을 발견했던 겁니다. 그래서 서독정부의 도움으로 풀려날 때까지 모두 합해 7년을 그 무시무시한 보위부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무사했습니까?

WW: 제가 체포된 후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아파트로 보위부가 들이닥쳐서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놨습니다. 부모님과 제 동생까지 모두 보위부에 끌려가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조사를 받았죠. 제 동생은 당시에 대학 &# xC5D0; 다니고 있었는데, 대학 측에서 다시는 저를 만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했습니다. 각서를 쓰지 않으면 더 이상 대학에 다니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또 우리가족은 전화도청에 시달려야 했고, 집에 배달되는 편지는 모두 보위부에 검열 당했습니다.

감옥에 갇 &# xD600; 계시는 동안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가겠다는 의지가 많이 꺾이셨을 것 같은데.

WW: 아닙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저항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 군수품 생산반에서 일했는데요, 거기서 소련 해군에 납품하는 대형 엔진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죄수와 함께 마지막 품질검사를 마친 엔진의 전선을 끊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백 개의 엔진을 못 쓰게 만들었죠.

그럼, 서독으로는 어떻게 넘어오실 수 있었던 겁니까?

WW: 저희 어머니가 감옥으로 면회 오셨을 때 제 사정을 담은 편지를 몰래 전해드렸습니다. 이 편지가 결국 서독 측에 전달된 후에는 국제사면위원회까지 이일을 알게 됐고, 1970년에는 제가 국제사면위원회가 지정한 올해의 죄수로 선정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독정부는 동독정부와 이른바 ‘정치범 석방거래’(Freikauf)를 통해서 돈을 주고 동독의 정치범들을 데려오고 있었는데, 제가 그 정치범 명단에 오르게 된 겁니다.

그러다 마침내 1971년에 다른 마흔 명의 동독 정치범들과 함께 저는 서독정부에 인계됐습 &# xB2C8;다. 그 때 당시 저희들은 버스로 국경까지 호송돼서 서독측이 준비한 버스로 갈아탔는데요, 서독지역으로 들어서자 신호등마다 저희가 탄 버스를 위해 푸른 등이 켜져 있었고 국경수비대원들이 저희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주간기획 “독일난민 이야기” 오늘은 동독 난민 출신의 볼프강 웰쉬 씨의 동독 탈출기를 들어봤습니다. 다음주에는 웰쉬 씨의 서독 정착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김연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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