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기획 “동독 난민 이야기” - 볼프강 웰쉬의 서독 정착

200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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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동독이란 나라는 냉전 시절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있다 지난 90년 서독에 의해 전격적으로 흡수 통일된 나라입니다. 당시 동서독 통일의 물꼬를 튼 데는 공산주의 붕괴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서독행을 감행한 동독 난민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은 볼프강 웰쉬(Wolfgang Welsch)씨의 서독 정착에 관한 얘기를 들어봅니다. 진행에 김연호 기자입니다.

동독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갇 &# xD600;있던 볼프강 웰쉬 씨는 서독정부의 도움으로 1971년에 서독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독정부는 동독정부와 이른바 ‘정치범 석방거래’(Freikauf)를 통해서 돈을 주고 동독의 정치범들을 데려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마흔 명의 정치범들과 함께 서독정부에 인계된 웰쉬 씨는 먼저 서독에 있는 난민촌에 들어갔습니다. 웰쉬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단 헤센주에 있는 기센 난민촌에 수용됐었는데요, 들어가자마자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갇혀있었던 &# xB3D9;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를 받았습니다. 서독과 연합군 당국에서 온 조사관들에게 동독에서 가져간 신분증과 저의 정치적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들을 보여줬죠. 조사는 간단히 끝났습니다. 분위기도 좋았고, 조사관들은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저를 대해줬습니다.”

기센 난민촌에 대해서 잠깐 설명 좀 해주세요. 어떤 곳이었나요?

Wolfgang Welsh: 당시 기센 난민촌에는 대략 250명의 난민이 수용돼 있었는데요, 주로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탄압받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보통 거기서 2주정도 있다 나갔는데, 난민촌에 있는 동안에는 나무로 지은 작은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한 방에 네 명 &# xC815;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방안에는 각자 쓸 수 있는 침대와 의자 그리고 옷장이 따로 있었고 작은 탁자도 하나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복도 끝에 따로 있었습니다. 식사는 커다란 식 &# xB2F9;건물에 모두 모여서 했습니다.

동독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다가 풀려나서 방금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라 모두들 들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난민촌 관리사무실 건물과 옷가지와 생필품을 나눠주는 건물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 공짜로 지급받았습니다. 난민촌 안에 병원이나 학교는 없었고 상점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난민촌 밖에 있는 기센시로 나갔다 올 수는 있었습니다. 난민촌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나갈 때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물론 외부인들은 난민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난민촌에서 나오신 다음에 서독정부로부터 어떤 정착지원을 받으셨나요?

WW: 서독정부에 정착지원을 신청했더니 3만 마르크를 주더군요. 제가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금 형식으로 받은 것입니다. 당시 3만 마르크면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습니다. 이 돈을 받은 다음에는 저 혼자서 모든 걸 다 알아서 해나가야 했습니다.

먼저 저는 대학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기센 대학에서 사회학, 철학 그리고 정치학을 공부했죠. 사는 건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그리고 장학금을 받아서 집세를 해결했습니다. 동독에 두고 온 가족들이 보고 싶기는 했지만, 외롭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서독에 정착하기 시작하셨을 때 어떤 기대를 안고 계셨습니까?

WW: 저는 서독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 기대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독에서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물론 그 기대는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서독이라는 자유롭고 개방된 민주 사회에서 사는 게 하나도 힘겹지 않았습니다. 동독에 있을 때부터 서독의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서독사회에 대해 이미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동독에 계실 때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서방 &# xC138;계의 방송을 듣다가 당국에 발각돼서 처벌받은 사람들은 없었습니까?

WW: 동독에서도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상기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독 정부는 서방세계의 방송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국민들 &# xC774; 외부 방송을 시청하거나 청취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당 관료들만 발각됐을 때 처벌받았을 뿐입니다. 물론 보위부에서는 방해전파를 내보냈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방세계의 방송에서 전해주는 소식들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서독에서 운영하는 방송 말고도 미국의 자유유럽방송도 동독 사람들이 즐겨들었습니다.

학업을 마친 다음에는 새 직업도 구해야 하셨을 텐데.

WW: 사실 동독에서 연기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배우의 길을 계속 걸으려고 했었죠. 그래서 서독의 하노버와 뒤셀도르프에 있는 극장에서 몇 번 일도 해봤습니다. 그렇지만 연극대사를 더 이상 외울 수 없었던 게 큰 문제였습니다. 동독 정치범 수용소에서 7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정신장애가 생겼습니다.

구체적 &# xC73C;로 어떤 가혹행위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겁니까?

WW: 특별히 어느 하나를 집어서 애기하기는 어렵구요,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었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혹행위를 받은 것이 모두 합해지면서 제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던 겁니다. 의사 말로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병이라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을 받은 후에 나타나는 정신 장애랍니다.

그럼 배우가 되는 것 말고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하셨겠네요.

WW: 네. 그런데 직업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동독의 국가보위부를 주제로 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죠. 동독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가 이 논문을 쓰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 때문에 동독 국가보위부에서는 저를 다시 요주의 인물로 꼽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동독 난민들을 탈출시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동독 보위부와 저와의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주간기획 “독일난민 이야기” 오늘은 동독 난민 출신의 볼프강 웰쉬 씨의 서독 정착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다음주에는 웰쉬 씨가 동독 난민들의 탈출을 도운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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