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꿈은 금빛 날개를 타고 - 13회


2005.02.08

북한의 교회역사는 해방직후 기독교를 소극적으로 박해를 했고 한국전쟁 전 후에는 적극적 박해, 그리고 1960-70년대는 완전 말살기를 거쳐 8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가 재출현 되고 있다고 해방 후 북한 기독교사를 연구한 목양교회의 유관지 목사가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북한에서 발간된 성경 찬송이 있지만 일반주민들은 접근 할 수 없도록 교회 성경창고에 쌓아두고 예배 때 나누어 주었다 다시 거두어들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담당에 이원희 기자입니다.

음악: 해방 후 북한교회사에서 강량욱의 위치와 역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관지 목사는 북한의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 주석의 친척이었던 목사 강량욱에 대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가 강돈욱 장로 인데 이분의 6촌 형제로 목사였고 북한 공산주의 정권수립 초기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을 지낸 김일성 정권수립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여러 요직을 거쳐 1972년 북한이 주석제도를 실시하는데 부주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량욱이 교회 역사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지난 1946년 11월에 조선기독교도 연맹을 설립했고 지금은 이름이 바뀐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가 강량욱의 둘째 아들인 강엽섭 목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 교회를 어떤 형태로든 이끌었고 지금 둘째아들 강영섭이 외교관 법관하다 갑자기 목사가 되어 조선그리스도 연맹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량욱 목사는 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어떻게 공산정권의 수립의 실무자로 또 서기장이 되었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추측이 가능하다고 유 목사는 지적합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강량욱이 북한 정권에 붙으니까 1946년 3월에 기독교반공청년들이 중심이 된 사람들이 이분의 집을 습격해서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바람에 첫 아들과 딸이 죽고 부인과 강량욱은 다치고 이에 대한 분노 때문으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입장에서 김일성의 부탁으로 부주석 직을 수락했지만 갈등이 많았다며 강량욱은 남한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박대선 목사와 친분관계로 당시 박대선 목사에게 “내가 참 괴롭습니다,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가면 나보고 목사님이라고 하고 목사님들이 모인데 가면 빨갱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라며 고민을 토로했다고 유 목사는 말합니다. 강량욱 목사는 고향인 칠골 당시 하리 또 칠골 이라고 하는 지역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자연히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고 유 목사는 말합니다.

지금 평양직할시 만경대 구역에 속해 하리는 기독교 지역으로 강량욱 집안전체가 칠골교회에 다녔고 지금 그 자리에 칠골 교회가 세워졌고 강량욱의 조카 손자 강명도 씨가 탈북을 했는데 북한총리 강성산의 사위, 이 사람을 통해 강량욱에 대해 들어보니 우리 칠골 강 씨는 기독교가 센 집안입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드군요.

강량욱은 목사가 되기 전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평양신학교를 졸업 하고 유명한 부흥목사가 되었다고 유 목사는 전합니다.

교회에서 세운 창덕학교, 김일성의 모교이기도 한데 거기에서도 했고 일본 유학 갔다 와서 평양신학교 졸업하고 1943년에 목사가 되었고 부흥회를 잘 인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일성 주석은 강량욱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유 목사에게 들어봅니다.

민족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강량욱은 숭실학교 다니다 집안이 가난해 중퇴하고 창덕학교 교사가 되어 조선역사 체육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김일성이 12살 때 입학을 합니다. 이때 강량욱이 담임선생 이었고 이 집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 주석은 소련에 있을 때 늘 생각나는 것이 강 선생이다, 강 선생이 조선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해 민족적인 영향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을 완전히 부정은 할 수 없다고 유 목사는 지적합니다.

김일성이 어쨌든 생전에 오랫동안 문 닫았던 봉수, 칠골 교회를 세웠는데 기독교적인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어떻게 받았는지는 그의 내면의 얘기죠.

이런 강량욱에 대해 북한사람들은 물론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도 모두 잘 알고 있지만 단지 그가 목사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유 목사는 전합니다.

탈북자들에게 강량욱에 대해 물어보면 그가 부주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그의 묘지는 애국열사 능에 있고 인물 직책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그가 목사라는 사실은 몰라요.

한편 유관지 목사는 해방 전 남한과 북한의 기독교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북한이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지만 그러나 해방 후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한국기독교의 모향이라고 말할 만큼 강성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뒤 초기에 북한정권이 소극적으로 기독교를 박해를 하기 시작했고 6.15전 후로는 적극적으로 박해를 했고 1960-70년대까지는 완전 말살기였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 재출현 현상이 보이기 시작해 지금은 교회도 둘이 있고 또 지금 제3의 교회를 한국장로교회 지원에 의해서 건립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성당건립 거의 다 짓고 북한 청년 3명을 러시아에 보내 정교회 신학 수련을 받았습니다.

유관지 목사는 북한이 기독교에 대해 달라지기는 했지만 외부에 보이기 위한 교회가 제 기능을 아직 못하고 성경 찬송 등도 주민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평양신학원도 건립되고 조선그리스도교 연맹 활동도 활발하고 성경도 남한에서 나온 공동번역성서를 북한 맞춤법, 북한의 어문체계에 맞게 다시 찍었죠. 찬송가도 해방 전에 신편 찬송가 그것을 다시 발행했고 외부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이 남한에서 쓰는 통일 찬송가를 많이 쓰니까 그것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찬송은 일반인들은 못 봐요 나오기는 북한에서 나왔는데 남한에서 더 많이 발견이 되고 있어요. 선물로 주기 때문이죠. 봉수 교회에는 성경창고라는 방이 있어 성경을 쌓아 두었다 예배시간에 내주고 다시 거두어 쌓아 두고 아예 건물 배치도에 성경창고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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