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이해의 산물, 재일동포 북송사업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4.12.12
1960_mankyungbong_ship-305.jpg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러시아 정부소장 북한관련 영상기록 사진. 1960년 북송된 재일동포와 만경봉호.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59년 12월 14일 함북 청진항에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가 닻을 내렸습니다. 일본 니가타항을 떠난 재일동포 234세대, 975명이 그 배에서 내려왔습니다. 북한이 세기의 민족 대이동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재일북송동포 사업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날부터 시작해 1984년까지 25년 동안 9만3340명이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 중에는 일본국적을 갖고 있는 1830여명의 일본인 처와 그 자녀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때 북으로 갔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깊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남은 혈육들까지 하나둘 사망하면서 돈줄이 끊겨 지금은 거지가 된 재일동포도 많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길이 없는데 후회해봐야 어쩝니까. 북한은 재일동포 귀국이 김일성의 따뜻한 사랑과 외교력 덕분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는 200만 명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중 140만명 가량은 고국에 돌아왔지만 나머지 60만 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남은 이들은 당시 엄청난 차별을 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국적도 없었고, 실업률도 일본인의 8배나 됐으며 조센징이라 손가락을 받으며 일상생활에서 걸음마다 차별을 받았습니다. 일본 정부도 사회 하층에 머물며 빈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복지 예산만 축내는데다 범죄율도 높은 재일조선인이란 존재가 성가셨고 어떻게 하든 이들을 치워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이들을 쫓아버리려면 우선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옳았습니다. 재일동포의 97%는 남쪽 출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이란 말만 들어도 질색을 하는 반일성향인데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도 없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수교는 1965년에야 이뤄졌습니다. 한국의 요구는 재일동포들에게 일본 국적을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적을 주기엔 부담스러웠던 일본은 북한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김일성도 처음엔 일본 동포들을 거지떼처럼 생각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어서 노동력이 부족했지만 그때까지는 수십 만 명의 중국 지원군이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해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56년의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중국군이 북한 땅에 있으면 자기가 언제든 제거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무조선 군대를 내보내라고 닦달질도 하고 애원도 해서 결국 쫓아 버리긴 했는데 중국 지원군이 나가고 나니 이를 대신할 노동력이 절실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태도를 바꾸어 일본에서 노동력을 데려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쫓아낼 곳이 필요했던 일본과 일꾼이 필요했던 김일성의 요구가 맞아떨어져 결국 재일동포 북송 회담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 사업은 겉으론 인도주의적 송환으로 포장돼 있었지만 선전과는 달리 철저히 추악한 속셈이 숨겨진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습니다. 일본은 북한이 1000명씩 데려가자 1500명씩 데려가라고 독촉까지 할 정도로 빨리 조선인들을 쫓아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적대관계로 대치중이었긴 했지만, 1959년 12월 13일과 14일에 재일동포 북송을 반대하는 400만 관제데모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북송이 시작된 뒤엔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에서 박탈당했던 재일동포들은 조총련이 북에 가면 누구나 공짜로 집을 주고, 복지도 보장해주고, 일자리도 기다리고 있다고 선전하자 그 달콤한 이야기에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북에 도착하자마자 상상하던 지상낙원은 없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당시 청진항에 내렸던 재일동포들은 마중 나온 환영인파의 모습이 한눈에도 일본보다 더 남루해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차례진 것은 한 칸짜리 집이었고 조국이라고 찾아간 곳에서 ‘반쪽빠리’ ‘째포’ 등의 차별을 받으며 간부로 승진할 수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차라리 좋았다며 그때를 그리워하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일본 친척들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행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겐 절망스럽게도 되돌아갈 배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북송이 오늘날 북한의 운명까지 좌우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1962년 북송선을 탄 사람 중에는 일제 때 오사카 히로타 군복공장에서 일했던 고경택도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귀국선에 올랐던 9살 어린 딸이 바로 오늘날 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였습니다.

고용희는 1953년 오사카 이쿠노 구 쓰루하시에서 태어났고, 처음 한국 이름은 고희훈, 일본 이름은 다카다 히메였습니다. 북에 가서 고용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가 나중에 이름에서 ‘자’자를 빼면서 고용희로 개명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쪽에선 고영희로 알려져 있었는데, 나중에 묘비를 직접 확인해보니 고용희, 그러니까 영희가 아니라 용희였더군요.

북한은 북송 동포들이 잘 산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일부 재능 있는 사람은 뽑아 쓰기도 했는데 춤에 소질이 있었던 고용희는 커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김정일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됐고 1982년엔 정철을, 84년엔 정은을, 89년엔 여정을 낳았습니다.

만약 고용희가 그때 북에 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 다카다 히메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래도 김정일은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봤겠지만, 여자가 달라지면 어떤 자식이 생길지 또 모를 일입니다. 같은 아버지임에도 어머니가 다르니 외향과 성격이 완전히 천양지차가 된 김정일과 김평일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엔 가정이 없다고 하지요. 어쨌거나 하바롭스크 출신 아버지와 오사카 출신 어머니를 둔 김정은이 백두 정통 혈통을 자처하며 여러분들의 왕이 돼 있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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