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 있는 가족들과의 전화통화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4.01.23
nk_cellphone_use-305.jpg 북한 평양시내에서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 주말 저녁, 고향에 있는 친언니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늦은 시간, 우리 가족은 맛있고 빛깔 좋은 딸기를 앞에 놓고 그날 하루 있었던 얘기와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손전화기가 울렸습니다. 한창 게임에 빠져 있던 손자 녀석이 놀란 모습으로 손전화기를 들고 달려 왔습니다.

국제 전화였습니다. 사기 전화가 많은 요즘 긴가민가 하는 생각으로 손전화기를 받았습니다. 전화통화를 하겠는가, 하는 교환수의 예쁜 목소리가 들렸고 재차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기에 들려 왔습니다. 평양에 있는 언니였습니다. 언니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잘 있었는가, 아픈 데는 없는지, 애들은 모두 잘 있는지를 물으며 직업은 계속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아픈데도 없으며 아마 북한에 있었다면 죽은 목숨이 아니면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녀도 천덕꾸러기 나이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나이에 맞지 않게 대접받는 공주병에 걸렸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직업도 있으며 북한에서는 생각도 해볼 수 없는 많은 사회 활동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역시 결혼을 해 이제는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을 손자 녀석들이 3명이나 있고 큰 손녀딸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도 전했습니다. 그리고 꼭 1년 만에 통화하는 언니와의 전화 상봉인지라 저 역시 언니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뇌출혈로 고생을 한다던 형부의 건강과 함께 언니의 건강을 물었고 고향에 있는 조카들의 안부와 형제들의 안부도 물었습니다.

언니는 올해로 나이가 65세라 북한에서 통행증을 해주지 않아 큰딸에게 부표를 달아 왔다고 하면서 조카가 옆에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언니에게 이곳 한국에 올 생각은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손자 녀석이 올 때 함께 떠나려고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기 전에 이곳 천국 같은 세상에 와서 살아보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카를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만 역시 너무도 많이 변한 조카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날 때에는 금방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통일거리 외화 상점에 배치되어 근무했었는데 지금 조카는 교통안전원과 결혼하여 14살이 되는 든든한 아들도 있고 사랑하는 남편도 있다고 하면서 올해 나이가 벌써 마흔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결혼생활은 행복한가고 묻기도 했고 이곳 사촌 동생들인 우리 애들도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과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을 이모의 손자들도 잘 있고 벌써 큰 손녀 딸애는 올해 학교에 입학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 조카의 직업을 물었습니다.

현재 중국에는 북한 당국에서 운영하는 음식점들과 재봉틀 회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조카 역시 그곳으로 가려고 취직했고 심사와 상담을 걸쳐 합격이 됐었는데 그만 신원조회에서 제기됐다고 합니다. 인민반에서 신원조회를 왔는데 말이 많은 한 주민이 친척이 행방불명됐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그동안 사망처리를 했었기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문제로 그만 많은 돈을 들이고 또 안면으로 그 회사에 취직했건만 울며 겨자 먹는 아쉬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직서를 냈다고 합니다. 애기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때 제가 해주고 싶은 얘기는 단 한 마디였습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그런 사람 못살 곳에 있지 말고 빨리 부모님과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길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남한으로 가면 잘살 수 있다는 아내의 말에 직업이 안전원이라는 신랑이 매일 저녁마다 14살 되는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중국과 남한으로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사상 교양 사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매일 저녁 이곳 남한 드라마를 본다고 합니다. 저는 비록 제 형제와 친척들이었지만 그들의 변화되는 모습에서 북한 주민들이 그 옛날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너무도 빠른 시간에 급속히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장성택의 사형과 관련해 국경연선의 경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며 긴장된 분위기지만 북한 주민들 속에서는 장성택 사형과 상관없이 그저 주민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기만을 바란다고 합니다. 남한과 북한, 강 하나를 두고도 서로 왕래할 수 없고, 전화로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북한주민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낼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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